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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Aug 08. 2022

어른의 의미를 생각하다

feat. [미생]의 오상식과 [나의 아저씨] 박동훈

"엄마, 드라마만 보지 말고 장애인과 소수자 문제에 대해 좀 진지하게 생각해 보세요."


남편과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재미있게 보고 있는데, 지나가던 딸이 한마디 툭 던졌다. 내가 무슨 차별적인 발언을 한 것도 아니고, 나름 보편적 인류애를 가지려 노력해 왔는데 난데없는 딸의 일갈에 머리가 띵했다. 그렇다고 이미 방으로 들어간 딸을 불러내 따지기는 좀 그렇고 해서, 혼자 곰곰히 따님의 귀한 말씀을 새겨보았다.




내가 기득권층이라고?


인정하는데 시간은 조금 걸렸지만, 어느새 나는 기득권층에 편입되었다. 아직도 내 학생들이 볼 시험지를 직접 복사하고 스테이플러를 찍고 시험감독도 직접 하는 처지이지만, 나이로 보나 직업으로 보나 나는 기득권층이라고 불리는 그 사람들 중 하나인 것이다. 막상 이 직업을 갖고 보니 월급은 대학등록금 동결과 더불어 10년째 그대로이고, 발언권은 너무나 제한적이라 "아뢰올 말씀이 있소이다”를 외치며 죽었다는 허균에게 동질감을 느낄 지경이지만, 그렇다고 기득권층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다.


기득권층이란, 이미 권력을 획득한 사람들이라는 뜻이다. 물론 상대적 개념이기 때문에 거기에 속한 사람들도 나처럼 "내가 아직 이 모양 이 꼴로 사는데 무슨 기득권?"하는 생각을 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시야를 좀 넓혀 사회 전체에서 내가 차지하는 위치를 생각해 보면 "어머나, 내가 기득권층이네?"라는 깨달음을 얻는 사람들도 많을 것이다.


With great power comes great responsibility.


굳이 스파이더맨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상대적으로 많은 권력을 가진 사람에게는 더 많은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다. 우리 딸의 관점에서 나는 기득권층에 속한 인물 중에 가장 가까이에서 가장 만만하게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 사회에 장애인과 소수자 차별 문제가 버젓이 존재하는데,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 드라마를 보는 것 외에) 엄마는 도대체 무엇을 하셨나요? 그런 얘기를 제 딴에는 부드럽게 돌려 말한 것이었다.

 



드라마 [미생]이 2014년 작품이라니 헛웃음이 나온다. 세월이 이렇게 빠를 수가 있구나.


[미생]은 윤태호 작가의 웹툰을 원작으로 한 드라마인데, 직장생활을 너무나 리얼하게 그려내어 직장인들에게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얼마나 많은 상을 수상했는지 위키피디아에 표기된 것만도 20개가 넘는다. 갑자기 [미생]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그속에 어른의 좋은 본보기가 있기 때문이다.


https://www.netflix.com/kr/title/80165295


[미생]은 원인터내셔널이라는 국내 굴지의 무역회사를 배경으로 한다. 영업 2팀의 오상식 차장은 사내 정치에는 무관심하고 오직 상사맨이라는 자부심과 뚝심, 열정으로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한다. 팀원이라고는 달랑 김대리 한명이라 항상 일손이 달리고, 동기들보다 승진이 늦어 실적 압박이 이만 저만 아니다. 첫회부터 피곤에 쩔어 양쪽 눈에 핏줄이 선 상태로 교통 체증이 심각한 서울 시내를 운전하며 등장한다.


이런 오차장 팀에 장그래라는, 이름부터 심상찮은 인턴사원이 배치된다. 어려서부터 바둑만 두다가 고등학교는 검정고시로 졸업했다더니 우주에서 방금 도착한 외계인처럼 물정 모르고 어리버리하다. 원인터내셔널은 명문대 출신에 온갖 외국어 자격증과 공모전 수상실적 같은 화려한 스펙을 갖춘 지원자 중에서 경쟁을 통해 인턴을 뽑는 회사인데, 장그래는 한눈에 봐도 이질감이 느껴진다. 체구는 아담한데 돌아가신 아버지가 입던 헐렁한 양복까지 걸치니 허수아비가 따로 없다.


언제나 일손이 부족했던 오상식 차장은 인력이 보강된다는 소식에 무척이나 기뻐했는데, 막상 배치된 장그래를 보니 한숨이 절로 나온다. 팀에 하나도 도움될 것이 없어 보이는 장그래가 오는 바람에 다른 유능한 인턴을 받을 기회도 사라진 것이다. 더구나 철강팀에 새로 온 인턴 안영이는 대리급 사원보다 더 능숙하게 업무를 처리하고, 영어, 러시아어에 능통하며, 팀원들의 갑질에도 커피, 담배, 구두 심부름을 독하게 해낸다. 오상식은 대놓고 안영이가 우리 팀에 왔어야 한다며 장그래를 구박한다.


이때까지 오상식은 "내가 무슨 기득권이야?"를 외치는 나같은 사람의 행태를 보인다. 말하자면 내코가 석자인데, 온 힘을 다해 달려도 뒤쳐지고 지금 따라잡지 않으면 영영 뒤쳐질 것 같은 절박함 속에 살아가는데, 장그래 같은 애를 데리고 어떻게 뛴다는 말인가!


이랬던 오상식은 "가르쳐 주실 수 있잖아요"라며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는 장그래에게 마음의 문을 연다. 그리고, 온갖 편견과 차별 속에 장그래가 자신의 잘못이 아닌 일로 억울하게 질타를 당하자 "우리 장그래"라고 부르며 자신의 날개 밑에 품어준다. 이후의 이야기는? 궁금하신 분은 남은 여름 휴가를 미생과 함께 하시기 추천한다.




2018년 방영된 드라마 [나의 아저씨]는 [미생]과 마찬가지로 내코가 석자인 상황에서 선뜻 어른의 역할을 받아들인 박동훈 부장이 주인공이다. 남녀 주인공의 관계에 대해 약간의 오해가 있었던 지라, 본방이 끝난 후에야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2019 백상예술대상 드라마 작품상을 받았다.


https://www.netflix.com/kr/title/81267691


박동훈 부장은 삼안 E&C라는 건축설계회사의 안전진단 2팀 팀장을 맡고 있는 구조기술사이다. 대학 후배가 대표이사로 있는 회사에 부장이라니 이래저래 입장이 곤란하다. 게다가 대표에게 과잉충성하는 윤상무가 박동훈을 눈엣가시처럼 여기고 제거하려 들기까지 한다. 위험한 구조물을 직접 기어 올라가 진단을 할 정도로 자신의 일에 진심인 박동훈 부장에게 주어진 팀원은 달랑 세 명. 상당히 굵직한 프로젝트들을 맡고 있어 힘은 힘대로 들지만 프로젝트 건수가 적다며 압박을 받는다.


삼형제 중 둘째인 박동훈에게는 회사에서 잘리고 백수가 된지 오래인 형과 영화 감독을 꿈꾸며 한번도 백수를 면해본 적 없는 동생이 있다. 노년의 어머니는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두 백수 아들을 먹여살리고 있다. 삼형제 중 유일하게 대기업 부장에까지 오른 박동훈은 집안의 자랑이자 희망이다. 그래서 통장 잔고가 겨우 29만8천원이지만 현금 서비스를 받아 형이 딸의 결혼식에 입고 갈 양복을 해준다.


박동훈의 아내는 대학 동창으로, 아들을 출산한 그해에 사법고시 1차에 합격하고, 다음 해 바로 2차까지 합격해 버린 대단한 능력자이다. 나름 꿈꾸어온 결혼생활이 있을텐데, 남편은 늘 어머니와 형제가 우선이고 아들은 미국에 조기유학을 보내버렸다. 삶이 공허한 아내는 결정적으로 어리석은 선택을 하여 박동훈의 처지를 더욱 딱하게 만든다.


[미생]의 오상식이 제코가 석 자라면, 박동훈의 코는 다섯 자 정도 될 것 같다. 오상식에게는 개구장이 두 아들과 전업주부 아내가 있어 가장으로서의 어깨는 무거울 망정, 아들들의 요청대로 반반무마니(양념치킨 반, 후라이드치킨 반에 무는 많이)를 사들고 퇴근하는 기쁨이 있다. 퇴사를 결심했을 때에는 굳건한 아내가 든든하게 응원을 해주기도 한다. 반면 박동훈은 원가족에 대한 책임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는 존재이며, 자신이 꾸린 가족은 텅 비어 버렸다. 그 공허함을 달래려 박동훈은 날마다 동네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주말이면 조기축구회에서 공을 찬다. 두 사람이 직장에서 겪는 어려움은 비슷하지만, 박동훈의 처지가 확실히 더 딱해 보인다.


그런 박동훈의 회사에 비에 쫄딱 젖은 길고양이 같은 여직원이 하나 있다. 이름은 이지안. 체구는 눈에 띄게 작고, 혈색은 창백하며, 옷차림은 초라하다. 사무실 화분에 물을 주고, 개인 우편물을 직원들 책상으로 배달해주고, 영수증 처리를 도와주는 것이 이 계약직원의 업무다. 아무도 그녀에게 다정한 말 한마디 건네지 않고, 누구와 함께 식사하는 걸 본 적도 없다. 어디서 무슨 봉변을 당했는지 멍이 가득한 얼굴에 선글래스를 끼고 출근해도 어쩌다 그랬는지, 신고는 했는지, 병원은 다녀왔는지 아무도 신경쓰지 않는다. 하지만, 박동훈은 이 아이를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비록 자신의 코가 다섯 자는 되고, 지안조차 자신을 이용해 먹으려고 접근한 것이지만.




오상식과 박동훈은 둘 다 이 시대의 어른을 보여준다. 직장에서, 집에서 각자 감당하기 버거운 책임을 짊어지고 있다. 나이는 50을 바라보는데 아직도 자신의 자리가 위태위태하다. 이런 상황에서 나보다 연약해 보이는 존재를 품어 돌보고 성장하게 도와줄 여유는 저절로 생겨나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손을 내밀어 어른의 역할을 자처한다. 


내가 학교에 들어가기 전에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언니들이 대단해 보였다. 나도 학교에 가면, 뭔가 대단히 달라질 것처럼 생각하곤 했다. 그런데 막상 초등학교에 가보니 나는 여전히 힘없는 어린이일 뿐이었다. 이런 기대와 실망은 중학교에 들어갈 때도, 대학에 들어갈 때도, 사회에 나올 때에도, 박사학위를 마쳤을 때도, 교수가 되었을 때도 마찬가지로 반복되었다. 감히 상상해 보건대, 어느 시대에도 어른들이 살 만하고 여유가 있어서 아이들을 챙긴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오상식은 장그래와, 박동훈은 이지안과 함께  고군분투 끝에 자신의 상황을 역전시킬 기회를 얻고 새 출발을 한다. 혼자 살아남기도 버거웠는데, 함께 살아남자니 가야만 하는 길은 오히려 분명해졌다. 더 이상 선택지가 없었던 오상식과 박동훈 기어오르는 대신 날아오르기를 선택하, 결과적으로 모두에게 좋은 일이었다. 드라마니까, 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배우고 싶은  어른의 모습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런 어른들이 많다면 자녀를 세상에 내놓는 부모들의 마음도 조금은 푸근해지지 않을까.




나는 드라마 초반의 오상식, 박동훈과 다를 바 없는 삶을 살고 있다. 연구년을 받아 잠시 숨통이 트였지만, 본질적으로 달라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 글을 쓰는 동안에도 "지금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할 때인가. 논문을 써야지 논문을!!" 하며 질책하는 마음의 소리가 들린다. 그렇지만 이런 시간을 가지지 않고 어떻게 내가 진정한 어른이 될 수 있을까. 나와 내 가족만 챙기는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딸과 다음 세대에게 당당한 어른이 되고 싶다.

 


이미지 출처: https://m.hankookilbo.com/News/Read/2014120316677811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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