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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Jul 20. 2022

말을 좀 줄이고 글을 더 쓰기로 했어요

feat. 나의 해방일지 염창희

얼마 전 구씨 신드롬을 불러일으킨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가 있었다. 드라마는 '당미'라는 가상의 수도권 소도시에 살면서 서울로 출퇴근하는 삼남매-염기정, 염창희, 염미정-를 중심으로 펼쳐진다. 세간에서 가장 관심을 받은 인물은 막내인 염미정과 그녀가 추앙하기로 결심한 구씨였지만, 나에게 가장 큰 울림을 준 인물은 염창희였다.


염창희는 이 집의 유일한 아들인데, 그렇다고 금이야 옥이야 귀하게 컸을 것이란 오해는 재빨리 접어야 한다. 기쎈 누나와 여동생에게 밀려 집안에 멀쩡한 화장실을 두고도 마당 수돗가에서 몸을 씻고 푸세식 화장실에서 볼 일을 본다. 아무리 더워도 에어컨 한번 마음대로 켜지 못하고, 머나먼 출퇴근길을 위해 차를 사고 싶어도 부모님의 반대로 살 수 없다. 일주일 내내 고단한 통근길과 업무 스트레스에 시달리지만, 주말이면 군말 없이 부모님의 밭농사를 돕는다.


창희의 유일한 해방구는 끊임없는 그의 수다를 들어주는 어릴 적 동네 친구들과 입사 동기 민규이다. 창희가 친구와 함께 하는 장면에서는 거의 항상 창희가 말을 하고 친구들은 리액션을 해주는데, 누구 하나 불평 없이 잘 들어준다. 가끔 제대로 안 듣고 엉뚱한 소리를 하기도 하지만, 듣기 싫다거나 그만 좀 떠들라는 사람이 없다. 마치 창희의 수다가 들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여기거나 아니면 자신들에게 뭔가 대리만족을 주기라도 하는 듯이.


자신이 이렇게 말이 많은 사람임에도 불구하고, 창희를 가장 힘들게 하는 사람들은 다름 아닌 말로써 그를 힘들게 한다. 우선 그가 다니는 편의점 본사에는 옆자리에 끔찍하게 말이 많은 정선배라는 인물이 있다. 자기가 먹은 삼시 세 끼는 물론 디저트와 커피가 무엇이고 어땠는지, 자신의 가족은 물론 사돈의 팔촌에게 일어난 일들까지 하루 종일 쉴 새 없이 떠들어댄다. 창희가 하루 외근을 하고 다음 날 사무실로 출근하면, 전날 하지 못한 얘기를 하나도 빠짐없이 꺼내서 들려준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말의 양도 양이지만, 그 내용이나 태도 또한 듣는 사람의 신경을 곤두서게 한다.


창희를 힘들게 하는 또 한 사람은 그가 관리하는 편의점의 점주이다. 바람난 남편과 이혼하고 위자료 대신 편의점을 받은 그녀는 사람 좋은 창희에게 시도 때도 없이 전화해 한 시간이 훌쩍 넘도록 하소연을 해댄다. 그녀가 지키고 앉아있는 그 편의점에서 전남편이 상간녀와 불륜을 저질렀기 때문에 출근을 하면 자꾸 그 괴로운 생각이 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는 차마 말할 수 없어 이미 사정을 다 아는 창희에게 자기도 모르게 자꾸 전화를 건단다. 피곤에 찌들어 퇴근하는 지하철에서, 저녁 식사 중간에, 친구들과 술 한잔 하다가도 창희는 그녀의 전화를 외면하지 못하고 그 하소연을 다 들어준다.


창희가 이렇게까지 다른 사람의 말을 다 들어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창희는 모든 등장인물 중에서 '인간에 대한 예의', 말하자면 '보편적인 인류애'를 가장 성실하게 실천하는 사람이었다. 누군가 말을 할 때 싫어도 들어주는 것은 마치 길에서 나눠주는 전단지를 귀찮지만 받아주는 것과 같다. 집까지 들고 와서 고스란히 분리배출함에 넣을지언정 내미는 전단지를 내미는 "사람"을 외면하지 않는 것. 이런 창희의 특성은 그가 야심차게 준비한 사업을 시작도 못해 보고 망한 이유와도 연결되며, 결말 부분에 선택하는 뜻밖의 직업(혹시 아직 안 보신 분에게 스포일러가 될까 봐 밝히지 않습니다)과도 연결된다. 


창희는 정글 같은 회사 생활, 지옥 같은 출퇴근길, 계속되는 연애 실패, 희망이 보이지 않는 현실 속에서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텨내고 있다. 그런 창희에게 가장 힘을 주는 사람들은 뭐니 뭐니 해도 그의 이야기를 들어주는 어린 시절 친구들과 회사 동기이다. 어느 날 창희는 입사 동기 민규에게 정신없이 정선배의 뒷담화를 하다가 문득 깨닫는다. "혹시 나도 다말증인가?" 다말증이란 말이 많은 병이라는 뜻으로, 한자 '많을 다'에 순우리말인 말, 다시 한자로 '병 증'을 붙여 만든 기묘한 조합의 신조어이다. 정선배를 다말증 환자라고 흉보다가 사실은 나도 똑같구나 깨닫는 것이다. 창희는 이렇게 자기객관화가 되는 사람이다.


나는 여러 모로 창희와 닮았는데, 그중에서도 다말증 기질이 똑 닮았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나는 마음껏 수다를 떨며   있는 환경에 있지 않다. 직업적으로도 혼자 일하는 시간이 길고,  가족은 숫자도 적고 말하기와 듣기를 그다지 즐겨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창희처럼 나도 친구들에게 많이 의지하는데, 시대가 시대인 만큼 주로 단톡방을 이용한다. 그런데 한번씩은 내가 너무 자주 카톡을 울려대는  아닌지 자기 검열을 하게 된다


SNS를 끊은 뒤로 세상 돌아가는 사정을 체크하기 위해 자주 들르는 초대형 온라인 커뮤니티의 자유게시판이 있다. 그곳에는 별별 얘기가 다 올라오지만, 친구의 하소연을 들어준 후 "내가 감정의 쓰레기통이 된 것 같아요"라며 푸념하는 글도 단골로 올라온다. 그러면 순식간에 "그런 관계는 빠른 손절이 정답" 같은 댓글들이 달린다. 내 친구들도 예의상 내 수다를 들어주고는 있지만 어쩌면 지겹고 짜증 날 수도 있을 것이다.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단톡방에 올리는 글의 빈도가 확 줄었다. 내 카톡이 귀찮은 전단지처럼 느껴졌던 친구들에게는 반가운 변화일 것이다. 그렇지 않았던 친구들은 브런치에서 언제든지 내 수다를 읽을 수 있다. 글이란 모름지기 독자를 염두에 두고 쓰라 하였으나, 가장 중요한 독자는 쓰는 나 자신이다. 쓴다는 행위만으로도 마음이 충만해지고, 내가 쓴 글을 읽고 또 읽으면 같은 말을 하고 또 하지 않아도 되어서 좋다. 아직까지 나의 글쓰기는 다말증 극복을 위한, 이기적이고도 무해한 글쓰기이다. 



이미지 출처: tvN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스튜디오피닉스, 초록뱀미디어, SL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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