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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Aug 24. 2022

김치찌개와 랍스터

취향을 드러내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푸드 이상형 월드컵이라고 들어보셨는지? 시작은 32강이다. 무작위로 제시된 두 가지 음식 중에 더 선호하는 것을 고른다(예: 라면 vs. 후라이드 치킨). 선택된 음식은 16강에 올라 다시 무작위로 뽑힌 다른 음식과 함께 제시된다(예: 후라이드 치킨 vs. 전주비빔밥). 당신은 또 두 음식 중 더 선호하는 것을 고른다. 이렇게 선택된 음식은 8강에 진출하여 다른 음식과 다시 대결을 펼치는 것이다(예: 후라이드 치킨 vs. 피자). 감이 잡히는가?


언젠가 딸아이가 친구들에게서  게임을 배워와  가족이 한번  보았다. 다른 가족 구성원의 게임 결과는  잊어버렸지만, 결승전에서 나의 고뇌는 지금도 생생하다. 무패행진 끝에 결승전에 도달한 김치찌개를 기다리는 메뉴는 바로 바로..... 버터구이 랍스터! , 나는 오래오래 고민했다. 빨리 고르라고 성화를 부리는 딸과 남편의 등쌀에  질끈 감고 하나를 고르기는 했지만,  선택이 다시 주어진다면 나는  고민할  같다. 이까짓  뭐라고.




취향은 계급을 드러낸다.


김치찌개와 랍스터 사이의 선택은 이까짓 것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을 내포한 선택이었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피에르 부르디외(Pierre Bourdieu) 따르면,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나고 자란 사회적 환경의 영향을 받아 무의식 중에 아비투스(habitus) 형성한다. 아비투스는 구조화된 개인의 성향 체계이며,  사람의 문화적 취향과 소비의 근간을 이룬다.  개인이 어떤 사회적 계급에서 성장했느냐에 따라 아비투스,  가치(의식) 실천(행동) 달라진다. 따라서  사람의 의식과 행동을 보면  사람이 어떤 계급에서 성장했는지   있다. 다시 말해 내가 김치찌개를 선택하는지 아니면 버터구이 랍스터선택하는지는 내가 어떤 계급에 속하는 사람인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2020년에 국내에 출간된 아비투스(도리스 메르틴 지음, 배명자 옮김, 다산초당)에서는 부르디외의 아비투스 개념을 "사회문화적 배경에 의해 결정되는 제2의 본성, 타인과 구별되는 취향, 습관, 아우라"로 재정의하였다. 최근 누군가와의 대화에 아비투스라는 단어가 등장했다면 아마도 이 책의 영향일 것이다. 내가 김치찌개를 선택하는지 랍스터를 선택하지는, 메르틴에 따르면, 내 취향, 습관, 아우라, 제2의 본성을 반영한다.


사회학자인 부르디외에게 아비투스불평등한 사회 구조를 고착화시키도 대를 이어 영속시킨다는 비판적 관점을 견지했다. 반면 경영 컨설턴트인 도리스 메르틴에게 아비투스최상위층이 되기 위해 배우고 체화해야   무엇이다. 최상위층에 태어나지 못했더라도 그들과 같은 아비투스를 체화한다면 당신도 최상위층에 도달할  있다는 것이 그녀의 주장이자 조언이다. 그녀의 책을 금과옥조로 여겨 실천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역겨움을 느끼고 집어던지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역시 각자의 아비투스가 작동한 결과일 터이다.


부르디외 역시 아비투스가 운명적인 것은 아니며, 살아가면서 자신이 속한 계층이 변화하면 아비투스도 어느 정도는 변화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부르디외는 프랑스의 시골 마을에서 우체국 직원의 아들로 자라나 프랑스 최고의 엘리트 학교에서 교육받고, 세계적 석학이자 실천적 지식인으로 많은 존경을 받은 사람이다. 말하자면 자기 자신이 계층 상승을 생생하게 경험한 사람이다. 엘리트 학교에서 만난 친구들은 대체로 대대손손 귀족 집안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아온 자제들이었으므로, 부르디외가 아무리 천재적이라 한들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힐 일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 특수한 경험 덕분에 브루디외는 누구보다 예민한 감수성으로 아비투스를 발견하고 수집하여 정교한 언어로 기록할 수 있었다. 그의 학문적 배경이 사회학, 철학, 인류학이었기 때문에 그의 관심은 상류층의 아비투스를 체화하여 계급 상승을 이루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아비투스가 어떻게 불평등의 대물림에 기여하는지에 관심을 가졌다.


브루디외에 따르면 상류층의 사람들은 자녀들에게 상류층의 아비투스를 물려주려고 애쓴다. 돈뿐만 아니라 경제자본(물질), 문화자본(취미), 사회자본(인맥), 상징자본(명성)의 네 가지 자본을 물려줌으로써 상류층의 아비투스는 다음 세대로 전수되고, 이를 통해 계층간의 불평등이 영속된다는 것이다. 왕이나 귀족의 아들로 태어나면 상징자본을 획득하게 되고, 당대 최고의 학자와 문인, 예술가, 무사, 과학자들에게 배우면서 고상한 취향(문화자본)을 형성한다. 최상류층의 자제들과 함께 엘리트 교육을 받음으로써 인맥(사회자본)도 형성한다. 메르틴은 여기에서 상징자본을 빼고 심리자본, 언어자본, 신체자본, 지식자본을 더하여 총 7개의 자본이 아비투스를 형성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자신이 컨설턴트로서 만나본 최상위층의 아비투스를 비교적 상세하게 기술하고, "이렇게 해봐요"를 제안하기도 한다.



계급상승자의 비애


낮은 계급에서 출발하여 지위 상승을 이룬 사람들은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이중의 타자성에 고통받기 쉽다. 자기의 출신 계급에서는 선망의 대상, 뭔가 불편한 이질적인 존재, 혹은 배신자로 취급받는다. 반면 자신이 도달한 상위 계급에서도 온전히 받아들여지기까지 어려움을 겪는다. 살아가면서 약간이라도 지위 상승을 이루어  사람이라면 (예를 들어 집안에서 처음으로 대학에 진학했다거나, 엘리트 직업 집단에 진입했다거나, 소득 수준이 확연히  높은 동네로 이사를 했다거나),  불편함을 경험해 보았을 것이다. 내가 속한  집단이 너무나 다른 아비투스를 가지고 있을  아니라,  집단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모두 어색하다.


특히나 최상위층으로 지위 상승을 이루었다면,  불편함은 더욱 크다. 최상위층의 속성  하나는 배타성이다. 아무나 가질  없는 , 아무나 이해할  없는 , 아무나 즐길  없는 것들에 대한 선호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의 "구별짓기" 추구하는 것이 최상위 취향의 핵심이다. 최상위층에사 계급상승자는 환영받는 존재가 아니다. 계급상승자라는 사실 자체가 스티그마, 낙인이 된다. 따라서 최대한 조용히  빠르게 최상위층의 아비투스를 관찰하고, 학습하고, 체화하여 그들에게 동화되어야 한다고 메르틴은 주장한다.


그런데 이게 쉽지 않다. 나의  직장은 클라이언트 응대를 위해 아비투스 교육을 실시하기도 했다. 신입사원들을 특급호텔에 모아놓고 서구식 테이블 매너와 에티켓을 가르친 것이다. 식사와 대화 매너는 물론, 차에 타고 내리는 매너, 문을 여닫는 매너, 나란히 걸어갈 때의 매너 ... 불발되기는 했지만 전직원을 대상으로 패션+스타일링 워크숍을 열라는 "상부의 지시" 있었다. 하지만, 두세 시간의 강연이나 워크숍으로 아비투스를 체화할 수는 없다. 나는 지금도 특급 호텔에 식사 초대를 받으면 약간의 어색함과 불편함을 느낀다.


메르틴에 따르면 무엇이 고상한 취향인지는 오직 최상위층만이 결정할 수 있다. 엊그제까지 고상한 취향으로 칭송하던 것들을 대중이 따라하게 되면 최상층은 순식간에 변덕을 부려 그것을 버리고 새로운 것을 추구할 수 있다. 브랜드 로고가 커다랗게 박힌 가방을 너도 나도 들게 되면 최상층은 그런 디자인을 천박하다 느끼고, 로고가 보이지 않는 디자인을 선호하기 시작한다. 최상위층의 아비투스를 배워서 흉내낸다 해도 계층상승자들은 취향을 드러냄으로써 “형편없는 취향의 소유자” 또는 "어설픈 따라쟁이"로 조롱받을 위험을 감수해야한다. 따라서, 계층화된 사회에서 취향을 자신 있게 드러낼 수 있는 것은 최상위층뿐이다. 자연스럽게 계층상승자의 취향 노출은 위축된다.


우리 사회는 한국전쟁 이후 엄청난 속도로 경제 성장을 이루었다. 그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하층민에서 중산층으로 계층 상승을 경험했다. 일부는 상위층, 또 소수는 최상위층으로 계층 이동을 했다. 계급상승자의 비애는 사실 우리에게 상당히 보편적인 경험일 것이다.




김치찌개와 랍스터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16강, 8강, 4강까지는 나의 취향이 그렇게까지 두드러지는지 몰랐다. 그런데 결승전에서 만난 두 선수는 나를 진심으로 시험에 들게 하였다. 나는 김치찌개를 수없이 먹었지만, 랍스터도 적지 않이 먹어 보았다. 내 입맛과 취향에는 단연 김치찌개가 더 좋다. 그런데, 나는 왜 단번에 김치찌개를 고르지 못했을까?


그것은 김치찌개와 랍스터가 가진 상징성 때문이다. 서민 음식의 대명사인 김치찌개보다는 랍스터가 더 고급스러운 취향이라는 인식. 게임은 분명 “나의 취향”을 묻고 있지만, 최상위층의 취향을 흉내냄으로써 격이 높아 보이고 싶은 세속적인 욕망에서 나는 자유롭지 못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잠시나마 김치찌개를 선택하는 것이 마치 내가 뼛속까지 흙수저라는 고백이나 선언처럼 느껴졌다.


지금 다시 김치찌개와 랍스터 사이에 선택을 강요받는다면? 당신이 만약  중에 하나를 골라야 한다면? 당신의 선택은 김치찌개입니까 랍스터입니까?



사족) 객관적 평가와 무관하게, 스스로를 최상위층이라고 느낀다면 자신 있게 취향을 드러냅니다. 따라서, 저에게는 김치찌개를 선택하는 것이 오히려 최상위층의 아비투스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kymel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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