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이중섭 특별전 관람
전공과 무관한 직업 세계로 진출한 대학 친구들이 여럿 있다. 변호사, 한의사, 프로그래머... 그중에서도 눈에 띄는 특이 이력의 친구가 있으니 바로 국립현대미술관 학예연구사로 있는 친구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친구가 자리를 잡은 것은 코로나 이전인데, 다들 아는 그 이유로 발이 묶여 그 사이 한 번도 찾아가 보지 못했다. 그런데 마침 다른 한 친구가 이중섭 특별전 입장권을 예약했다며 같이 가자고 나를 초대했다. 이중섭 특별전은 입장료가 무료이지만 관람객 수를 조절하기 위해 예약제로 운영하고 있다. 기왕 가는 김에 학예연구사로 있는 친구에게도 연락을 하였더니 표를 예약한 날에는 출장이 예정되어 있단다. 예약한 표를 취소하고 일정을 조율한 끝에 무더위가 한풀 꺾인 8월 말 어느 금요일 우리의 삼청동 회동이 마침내 성사되었다.
5호선 광화문역에 내려 현대미술관으로 가려면 2번 출구로 나와 광화문 앞에서 우회전을 하여 약간 걸어야 한다. 미대사관과 국립역사박물관 앞을 지나 직진하다 보면 오른쪽으로 대형 가림막 안에서 의정부 6조 거리를 재조성하기 위한 대대적인 공사가 진행 중이다. 광화문 바로 앞에는 새로운 도로 공사를 하는지, 아니면 광화문 광장 공사 뒤처리가 끝나지 않은 것인지 아직 길바닥이 파헤쳐져 있어 정신이 없다. 아침 저녁으로 찬 바람이 불고 한낮이라도 30도가 채 안 되지만, 동십자각 지하도쯤 도착하니 택시를 탈 걸 그랬나 후회가 들었다.
지하도에서 나와 미술관 방향으로 횡단보도를 건너는데 노란 원피스를 입고 연보라색 장미를 한 송이 든 친구가 안국역 쪽에서 걸어오고 있었다. 전시 예약을 하여 나를 초대하고, 미술관에 일하는 친구의 일정을 확인하며 이 모든 일을 기획한 장본인이다. 만날 때마다 나를 웃게 하고, 좋은 곳에 데려가고, 기억에 남는 선물을 쥐어주는 친구다. 우리 중에 제일 경제력이 있다고 하여 가끔 이재용으로 불러준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샤넬로 감싸는 날도 있지만, 자라에서 산 원피스와 보세 샌들을 신어도 예쁘기만 하다. 지하철역을 나오는데 장미를 팔길래 미술관에서 일하는 친구 준다고 한 송이 사들고 왔단다. 꽃보다도 그 마음씀이 더 아름답지 않은가.
약속시간 11시 30분 다들 미술관 로비에 모습을 드러냈다. 가장 멀리 올림픽공원에서 온 친구가 몇 분 먼저 도착해 앉아 있었고, 미술관에서 일하는 친구가 제일 늦게 그렇지만 정확한 시간에 나타났다. 네 명의 친구들은 너는 왜 하나도 늙지를 않냐, 머리숱 풍성한 것 좀 봐라, 어쩜 하나도 안 변했다, 같은 중년의 여자들의 인사를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나누고, 예약해 둔 식당으로 이동했다.
국립현대미술관은 정면에 경복궁을 바라보고 있다. 정문에서 오른쪽으로 돌아 위로 쭉 올라가면 청와대 가는 길이다. 청와대가 개방을 하면서 주차료가 비교적 저렴한 현대미술관과 정독도서관에 차가 많이 몰린다고 한다. 우리 모두 지하철로 모인 이유가 거기에 있다. 청와대 방향 말고 동쪽으로 꺾어 걸어가면 길이 오르락내리락하며 전통한옥과 현대적 건물들이 옹기종기 모여있다. 청와대 근처라서 고도제한이 있는지 우뚝 솟은 마천루는 없다. 정독도서관은 내가 좋아하는 문유석 판사(독자로서 그분의 책을 좋아할 뿐 개인적으로 아는 사이는 아니다)가 어린 시절 많이 갔던 곳이라고 그분 책에 자주 등장하는데, 그 앞을 지나가자니 괜히 재미있다.
올여름 비가 많이 내린 탓인지 온 동네 물청소를 한 듯 싱그럽다. 습기는 보송하게 마르고 햇살은 눈부신 아주 아름다운 날씨다. 예약한 식당은 이름이 콩쥐팥쥐인데, 파스타와 피자를 판다. 천장이 높고 해가 잘 드는 2층 창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창밖에는 기와를 얹은 담장과 늦여름 녹음이 짙은 나무가 가득하다. 한쪽 벽의 폴딩도어를 완전히 개방해 놓으니 큼직한 벌레가 머리 위로 날아다닌다. 에어컨 앞에 앉아서도 충분히 야외에 앉은 기분이 든다. 인스타그램을 하는 친구는 없어서 음식을 앞에 놓고 사진 촬영이 끝나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문어 요리를 애피타이저로 먹었는데, 양은 적었지만 쫄깃한 식감이 좋았다.
미술관에서 일하는 친구는 이력도 특이하지만 우리 과에서 같은 학번끼리 만난 캠퍼스 커플로 동기 중 가장 먼저 결혼식을 올린 갸륵한 존재이다. 자리에 모인 네 사람의 근황을 살핀 후에는 동기와 선후배들의 근황을 아는 대로 업데이트했다. 올해는 우리가 대학에 입학한 지 30년이 되는 해이니 기념으로 모임을 한번 갖자는 아이디어가 나왔다. 모임을 한다면 어디서 언제 모일지, 회비는 얼마나 걷으면 좋을지 얘기를 하다가 재미있는 드레스 코드와 비밀 선물 아이디어 같은 우물가에서 냉수 찾는 얘기들도 등장했다. 수험생 엄마들이 많아서 얼마나 호응이 있을는지 모르겠지만, 성사된다면 뭉클한 자리가 될 것 같다.
식사를 마치고 미술관으로 돌아와 이중섭 특별전을 관람했다. 고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이 기증한 90점과 국립현대미술관이 이미 가지고 있던 10점을 모아 총 100점으로 구성된 전시였다. 이중섭은 1916년에 태어나 1956년에 무연고자로 안타까운 죽음을 맞이하였다. 그 생애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슬픈 40년에 걸쳐 있으니 생과 졸의 연도만 보아도 가슴이 묵직해져 온다. 이번 전시에는 40년대에 아내에게 보낸 엽서화, 50년대에 그린 은지화가 주를 이루었다.
엽서화는 이중섭이 아내이자 문화학원 한 해 후배인 야마모토 마사코(한국명 남덕)에게 보낸 그림엽서들이다. 9x14cm 관제엽서의 한 면에는 그림을 그리고, 뒷면에는 자신의 주소를 남겼다. 펜이나 붓으로 사람과 동물, 식물을 쓱쓱 그렸는데 그 단순함 속에 순수함과 생명력이 넘치고, 사람과 삶에 대한 무한한 애정이 느껴진다. 내가 좋아하는 마티스와 비견할 만하다. 또 상상 속의 동물들도 많이 그렸는데, 그런 점에서는 샤갈의 그림을 연상시키기도 했다. 종이와 미술용품을 구하기 힘든 시절이었던 탓이겠지만 그림들이 모두 이렇게 작다는 것이 안타깝다.
은지화는 담뱃갑 그림으로도 불리는데, 담배를 포장하는 알루미늄 속지에 철필이나 못으로 윤곽선을 눌러 그린 후 검은색 물감을 문질러 넣어 선이 두드러지게 만든 그림이다. 고려청자를 만들 때 썼다는 상감기법과 같은 원리이다. 종이도 화구도 구하기 어려웠던 상황에서 이중섭이 만들어낸 새로운 기법인데,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라든가 "궁하면 통한다"는 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거다. 담배 포장지는 흔히 찢어져 있어서 모양이 반듯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한쪽 귀퉁이가 찢어져 나갔거나 아래쪽 모서리가 치맛단처럼 물결치기도 한다. 미술관 조명 아래서는 상당히 가까이에서 집중해서 보아야 정확한 선을 볼 수 있다. 은지화에 비하면 엽서화는 그나마 윤택한 시절의 그림이었구나 싶다.
은지화를 그리기 시작한 것은 생활고를 견디다 못해 아내와 두 아들을 일본으로 보낸 이후였다. 다행히 처가는 일본에서도 부유한 집안이었다 하니 전쟁통인 한국에서 처자식을 굶주리게 하는 것보다는 일본으로 보내는 것이 현실적인 선택이었을 게다. 덕분에 은지화를 포함한 이중섭의 그림을 관통하는 가장 큰 테마는 가족이다. 비록 가족을 먹여 살리는 데는 실패한 가장이었지만, 사랑의 크기로 보자면 이만한 아버지, 남편이 없을 것 같다. 그의 그림과 편지에는 가족에 대한 절절한 그리움과 사랑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과묵하고 권위적인 가부장 고정관념에 고통받는 남자들이 이 전시를 좀 많이 봤으면 좋겠다. 안타깝게도 관람객 대부분이 여성이지만.
개인적으로 이 전시의 하이라이트는 이중섭이 일본에 있는 아내에게 보낸 편지였다. 이중섭이 아내와 가족에게 보낸 편지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던 모양인데, 나에게는 생소했다. 아내를 향한 순수하고 절절한 사랑 표현이 보는 이를 웃게도 울게도 만든다. 이렇게 사랑하는 가족을 두고도 꼭 한국에 남아 그림을 그려야만 했는지. 만약 일본으로 갔다면 그림을 그릴 수 없는 무슨 사정이 있었던 것인지. 궁금한 만큼 안타까움도 컸다. 또 이렇게 가족과 생이별을 한 상황 속에서도 그림에 대한 열정은 전혀 흔들림이 없다는 것이 놀랍다. 뛰어난 재능과 노력에 더해 한없이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성격이 있었기에 이렇게 많은 작품을 남길 수 있지 않았나 생각해 본다.
당신이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 이 아고리는
머리가 점점 맑아지고 눈은 더욱더 밝아져서,
너무도 자신감이 넘치고 또 흘러넘쳐
번득이는 머리와 반짝이는 눈빛으로
그리고 또 그리고 표현하고 또 표현하고 있어요.
끝없이 훌륭하고... 끝없이 다정하고...
나만의 아름답고 상냥한 천사여.
더욱더 힘을 내서 더욱더 건강하게 지내줘요.
화공 이중섭은 반드시 사랑하는 현처 남덕 씨를 행복한 천사로 하여
드높고 아름답고 끝없이 넓게 이 세상을 돋을새김해 보이겠어요.
자신만만 자신만만.
나는 우리 가족과 세상 모든 선량한 사람들을 위해서
진실로 새로운 표현을 위대한 표현을 계속할 것이라오.
내 사랑하는 아내 천사 남덕 만세 만세
(아고리는 아내가 이중섭을 부르는 애칭으로 '턱이 긴 이 씨'라는 뜻이라고 한다. )
제주도 여행에서 이중섭 거리에 들른 적이 있다. 아직 어린 아이들을 여럿 데리고 갔던 친구들과의 여행이었는데 아이들 관리하느라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이중섭 거리도 갔다 온 기억만 희미하고, 유일하게 기억에 남는 것이 아내와 가족을 일본에 보내고 무척 가난하고 고달픈 삶 속에서도 그림을 그렸다는 사실이었다. 어느새 아이들이 훌쩍 자라 친구들끼리만 조용하게 미술관에서 이중섭을 만나니 그때와는 다르게 여러 생각이 떠오른다.
나도 남편과 태평양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나 홀로 육아를 해봤다. 남편과는 편지 대신 일주일에 한 번 실시간 영상 통화로 안부를 확인했다. 남편도 나름 다정한 편에 속하는 남자이지만, 이중섭처럼 절절하게 그리움을 표현한 적은 없다. 오히려 영상 통화 중에 딴짓을 하는 듯한 느낌적인 느낌을 풍겨 나를 서운하게 만들곤 했다. 아내와 딸을 멀고 먼 나라에 두고 걱정은 안 되나? 그립지도 않나? 생각하며 나 홀로 분노하기도 하고 이런 결혼 생활이 무슨 의미가 있나 회의를 품기도 했다.
전시회에 다녀와서 남편에게 슬쩍 이런 이야기를 던졌더니 "나도 많이 그리워했거든?!"하고 먼산을 본다. 남편은 TV를 보다가도 너무 아프거나 슬픈 장면이 있으면 바로 채널을 돌리는 사람이다. 자신의 외로움과 그리움을 찬찬히 들여다보는 대신 외면하는 방법을 택하고도 남을 사람이다. 그러니 그런 감정을 표현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그래도 이 남편이 맛있는 걸 만들어서 같이 먹자고는 잘한다. 사람마다 사랑의 표현 방식이 다른 법. 이런 남편과는 바다 건너 떨어져 살면 안 되고, 미우나 고우나 한집에 사는 것이 상책이다.
그날 함께 했던 친구들과 부푼 가슴으로 기획했던 30주년 기념 동창회는 생각보다 반응이 미지근하다. 집집마다 수험생도 있고, 아직은 많이 바쁜 나이다. 아마도 지금까지처럼 서로 연락하며 지내던 친구들끼리 모이는 것으로 정리가 될 것 같다. 다들 건강하기만 하다면 40주년 50주년 동창회도 못할 이유가 없다. 그때까지는 일단 나의 유붕이 자원방래 프로젝트를 계속해 볼까 한다.
1. 이중섭 특별전에 직접 가기 힘들다면, 디지털 전시회를 보아도 좋겠다. 오디오 해설까지 들어있는 전시회 영상을 아래 페이지에서 즐길 수 있다.
https://www.mmca.go.kr/exhibitions/exhibitionsDetail.do?exhFlag=1&exhId=202207190001542
2. 이미지 출처:
국립현대미술관이 언론에 제공한 사진들을 인터넷에서 갈무리하여 썼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