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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느님 Aug 30. 2022

추앙한다면 이중섭처럼

이중섭의 편지와 그림 들여다 보기

지난주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이중섭 특별전을 본 이후로 사랑꾼 이중섭에게 관심이 생겼다. 검색을 해보니 이중섭의 연서(사랑의 편지)들은 이미 널리 알려져 책으로도 출간되어 있었다. 마침 동네 중고서점에서 저렴한 가격에 판매하고 있길래 월요일 아침 기분도 전환할 겸 길을 나서 한 손에 쏙 들어가는 이중섭 편지와 그림들:1916-1956(이중섭 지음, 박재삼 옮김, 다빈치)을 업어왔다. 이중섭의 편지는 모두 일본어로 쓰여진 것을  우리말로 번역한 것이다.




이중섭의 편지에는 자신과 아내를 지칭하는 이름들이 여럿 나온다. 일단 이 이름들을 알고 가자.


이중섭은 일인칭 대명사 '나' 대신 이름으로 자신을 지칭할 때가 많다. 대향과 구촌은 이중섭의 호와 자가 아닌가 싶다. 가장 길게 이름을 쓴 경우에는 '중섭 대향 구촌'이라 하여 여섯 글자를 다 썼다. 짧게 쓸 때는 대향, 구촌, 중섭 중 하나를 골라 쓰기도 했다. 편지 끝에 서명을 할 때는 대향 또는 중섭을 가장 많이 썼는데 한글을 풀어서 쓰기를 즐겼다. ㅈㅜㅇㅅㅓㅂ. 그림에도 같은 방식으로 서명을 했다. 구개음화되는 소리의 표기가 바뀐 적이 있는 건지 ㄷㅜㅇㅅㅓㅂ으로 서명한 그림들도 있다.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는 '아빠'라고 쓰고 이어서 '중섭'이라고 쓴 경우가 많다.


아고리는 이중섭이 아내 남덕과 사이에서 사용한 애칭인데, '턱이 긴 이 씨'라는 뜻의 일본어라고 한다. 자신을 가리켜 "아고리는"과 같이 쓴 문장도 많다. 아고리와 짝을 이루는 남덕의 애칭은 발가락 군, 혹은 아스파라거스인데 남덕의 발가락이 길고 아스파라거스를 닮았다 하여 서로 이렇게 장난스러운 이름으로 불렀다. 아내의 본명은 야마모토 마사코인데, 남쪽에서 온 덕이 많은 여인이라 하여 남덕이라는 한국 이름을 이중섭이 지어주었고, 편지에서는 주로 남덕 군으로 불렀다.




"추앙? 그거 어떻게 하는 건데?"


tvN 드라마 [나의 해방 일지]에서 염미정이 구씨에게 추앙하라는 요구를 하자 구씨가 되묻는다. 그때 염미정은 쓸데없이 모호한 대답 대신 이중섭의 편지를 보여주었으면 좋았을 뻔했다. 사랑꾼 이중섭은 아내를 어떻게 추앙하였나. 우선 그가 아내를 어떻게 불렀는지부터 한번 보자.


나의 소중한 특등으로 귀여운 남덕 군
구촌의 가장 크고 유일한 기쁨인 남덕 군
나의 귀엽고 참된, 내 마음의 주인 남덕 군
나의 거짓 없는 희망의 봉오리 남덕 군
나의 귀여운 즐거움이여. 소중한 나만의 오직 한 사람, 나만의 남덕이여.
나의 살뜰한 사람 나 혼자만의 기차게 어여쁜 남덕 군
나의 멋진 현처, 나의 귀여운 남덕. 나만의 소중한 사람이여.
하늘이 베풀어준 나만의 보배로운 아내, 나만의 슬기로운 아내, 참된 천사, 나의 남덕이여.
아고리의 생명이오, 오직 하나의 기쁨인 남덕 군
내 최애의 어여쁘고 소중한 정다운 사람, 나의 둘도 없이 훌륭한 남덕 군
내 마음을 끝없이 행복으로 채워주는 오직 하나의 천사, 나의 남덕 군
나의 생명이오, 힘의 샘, 기쁨의 샘인 더없이 아름다운 남덕 군
나의 멋진 기쁨이며 한없이 귀여운 나의 남덕 군
나의 소중하고 소중한 사람, 멀리 떨어져 있어도... 언제나 내 마음을 기쁨으로 채우고 끝없이 힘을 불어넣어 주는 내 마음의 아내, 다정한 남덕 군
나의 귀여운, 나의 기쁨의 샘, 가장 아름다운 나의 아내, 소중한 소중한 나의 남덕 군
나의 상냥하고 수중한 사람, 가슴 가득한 단 하나의 사람, 나의 소중한 아내, 나의 남덕 군
언제나 내 가슴 한가운데서 끊임없이 나를 따뜻하게 해주고 격려해주는 나의 귀중한 오직 하나의 천사 남덕 군
나의 최고 최대 최미의 기쁨 그리고 한없이 상냥한 오직 하나의 현처 남덕 군

 

자, 이제 추앙 그거 어떻게 하는지 감이 오지 않는가?  


솔직히  남편이 나에게 이런 말을 남발했다면  몰래 어디 비싼 수입차라도 계약을 하고  건가 의심했을  같다. 이렇게  간지러운 사랑의 말은 성실하고 평범한 남자보다는 꾼들에게서나 기대할  있는 말이 아니던가? 예순다섯의 호색한 그리스인 조르바늙은 오르탕스 부인에게 경멸과 연민을 느끼면서도 입으로는 이런 말을 잘도 늘어놓았더랬다... 그런데, 이중섭의 아내에 대한 마음은 말뿐 아니라 그림으로도 표현되고 있어 그런지 전혀 의심이 들지 않는다.  사람을 암탉과 수탉으로 형상화시킨 작품 [부부] [환희] 보면  사람의 만남을 얼마나 황홀한 결합으로 생각하고 있는지  드러난다. 아내 역시 이중섭의 진심을 믿었음은 그녀가 이중섭에게  편지에서 드러난다. 남편만큼 많은 편지를 쓰지는 않았지만, 남덕 역시 비슷한 방식으로 남편을 불렀다. 편지의 시작은 '나의 사랑하는 소중한 아고리'이며 끝맺음은 '진정으로 사랑하는 당신의 아내 남덕'이다.


이중섭 작품 부부(왼쪽)와 환희(오른쪽). 한 쌍의 닭이 입맞춤을 하고 춤을 춘다. 부부의 사랑과 재회의 기쁨을 표현했다고 한다.





이중섭의 편지에는 아내에 대한 그리움, 특히 그녀를 껴안고 입 맞추고 어루만지고 싶어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드러나 있다. 이 역시 그가 아내를 추앙하는 한 방법이다. 1950년대에 한반도에 살던 남자가 이렇게까지 노골적으로 아내에 대한 그리움을 표현하였다니 놀랍고 또 놀랍다. 어떤 편지에는 상하좌우에 뽀뽀라는 글자를 60번 쓰기도 했단다.


내가 좋아 못 견디는 발가락 군을 손에 쥐고 당신의 모든 것을 길게길게 힘껏 포옹하오.
당신의 모든 것을 오래오래 힘껏 껴안고 있을테니 가만히 있어주오. 길고 긴 입맞춤을 보냅니다.
내 귀여운 당신의 볼에 있는 크고 고운 사마귀를 생각하고 있소. 그 사마귀에 오래 키스하고 싶소.
나는 소중하고 소중한 당신의 모든 것을 어루만지고 있소. 그 포동포동한 당신의 손으로 대향의 큰 몸뚱아리 모든 곳을 부드럽게 몇 번이고 어루만져주오. 더욱 힘껏 꼬옥 안읍시다.
한없이 억센 포옹 또 포옹과 열렬한 뽀뽀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받아주시오. 발가락 군에게도 뽀뽀 전해주오.
다정하고 진정한 천사여, 강하고 강한 포옹과 열렬한, 미칠 것 같은 뽀뽀를 받아주시오.


요정 마사(왼쪽)와 여자를 기다리는 남자(오른쪽). 이중섭의 뮤즈는 남덕이었다고 한다.




이중섭은 또한 자신과 아내 사이의 사랑을 매우 특별한,  누구의 사랑보다 고귀한 사랑으로 추켜 올린다. 나아가  사람의 사랑이 자신의 예술 활동이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라고 말한다. 실제로 이중섭의 그림은 이러한 믿음을  보여주어 가족과 사랑이라는 테마에 집중되어 있. 이쯤 되면 이중섭의 추앙이 빈말이 아니라 지극히 실천적인 사랑이었음을 누구라도 인정할 것이다.

어떠한 부부가 서로 사랑한다고 해도, 어떠한 젊은 사람들이 서로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현재 내가 당신을 사랑하고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열렬한 애정만한 애정이 또 없을 것이오. 일찍이 역사상에 나타나 있는 애정 전부를 합치더라도 대향과 남덕이 서로 열렬하게 사랑하는 참된 애정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게요. 그것은 확실하오. 당신의 멋지고 훌륭한 인간성이 대향의 사랑을 샘처럼 솟게 하고, 화산처럼 뿜어 오르게 하고, 바다처럼 파도치게 하는 것이오.
귀여운 당신을 향한 열렬한 애정으로 나는 지금 가슴이 터질 것 같소. 제정신이 아니오. 하루 종일 생생한 감격으로 꽉 차 있소.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자꾸만 걷잡지 못할 작품 제작욕과 표현욕에 불타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오.
예술은 무한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의 표현이오. 참된 애정이 충만함으로써 비로서 마음이 맑아지는 것이오, 마음의 거울이 맑아야 비로소 우주의 모든 것이 올바르게 마음에 비치는 것 아니겠소? (중략) 무한히 소중한 남덕만을 사랑하고, 사랑하고 또 사랑하고 열애하고, 두 사람이ㅡ 마음에 비친 인생의 모든 것을 참으로 새롭게 제작 표현하면 되는 것이오.




이중섭은 두 아들에게도 멋진 아버지가 되겠다는 다짐과 약속을 보낸다. 아내에게 보낸 편지 끝자락에 아들들에게 보내는 메시지를 적기도 했지만, 나중에는 아들 태성과 태현에게 각각 편지를 보내기도 한다. 종이가 없어서 편지를 한 장만 쓴다거나 그림을 한 장만 그렸다거나 하는 내용도 자주 보인다. 화가로서의 자부심과 가난한 아빠로서의 안타까움이 잘 드러나는 편지들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언제나 보고 싶은 내 아들 태현아

잘 있었니? 오늘 엄마한테서 온 편지에는 요즘 태현이가 운동회 연습으로 새까매져서 집에 온다고?... 태현이의 건강한 모습을 그려보며 아빠는 기쁜 마음으로 꽉 차 있다.
지든지 이기든지 상관없으니 용감하게 싸워라. 아빠는 오늘도 태현이와 태성이가 물고기와 게하고 놀고 있는 그림을 그렸단다.

아빠 ㅈㅜㅇㅅㅓㅂ
이번에 아빠가 빨리 가서... 보트를 태워주마. 아빠는 감기로 닷새 동안 누워 있었지만, 이제는 다 나아 또 열심히 그림을 그리고 있단다. 어서어서 전람회를 열고서... 그림을 팔아 돈과 선물을 잔뜩 사 가지고... 갖고 갈 테니... 몸 성히 기다리고 있어 다오.

아빠 ㅈㅜㅇㅅㅓㅂ
두 어린이와 사슴(왼쪽), 다섯 아이들(오른쪽). 이중섭은 재미있는 그림을 그려 아들들에게 보내기를 좋아했다.


이토록 간절히 그리워했음에도, 이중섭은 1956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도쿄에 있는 가족을 딱 한번 방문했고 그나마도 일주일이 채 안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견우와 직녀도 일 년에 하루는 만난다는데, 이중섭은 인생의 마지막 3년을 아내와 아들의 얼굴 한번 보지 못한 채 보내야만 했다. 보고 싶고 궁금한 마음을 달래고자 아내에게 자세한 편지와 사진을 보내달라는 요청을 자주 한다. 또 받은 편지와 사진은 보배처럼 귀하게 여기며 보고 또 보았다. 이 역시 이중섭의 추앙법이다.


그럼 몸 성히 잘 있어요. 3일에 한 통씩 꼭 편지를 보내주시오.
그럼 몸 성히 많은많은 편지 보내주기 바라오.
당신도 되도록 매일 편지를 써 보내주오. 그럼 기운을 내어 또 편지 주시오.
사흘에 한 통씩 편지 보내는 것 잊지 마시오. 당신의 예쁜 발 사진을 빨리 보내주시오.
사흘에 한 번은 편지를 받고 싶은데... 보내주기를.
될 수 있는 대로 빠른 시일 안에 당신의 얼굴 사진, 아이들과 함께 있는 사진, 아스파라거스(나만의) 군의 사진 세 포즈쯤 지급으로 보내주기 바라오. 연달아 마음을 담은 편지를 보내지요. 5, 6일에 한 통은 꼭 편지를 주시오.


이렇게 편지에 진심인 이중섭인데, 두 아들을 데리고 스스로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아내 입장에서는 편지를 쓰는 것도 일이었을 것이다. 아내의 편지가 뜸하자 이중섭의 서운함이 폭발했다.


대향이가 반년 간이나 사흘에 한 통씩의 편지를 애원하다시피 했는데 그래 몇 번이나 내 소원대로 편지를 냈다고 생각하오? 일 년 넘게 서로 헤어져 있으면서 그토록이나 소원을 했는데도 그 소원하는 바를 이행치 못하는 여자를... 어떻게 믿으라는 거요? 대향의 소원대로 못하겠으면 그만두시오. 분명한 답장이 없는 이상 불쾌하오. 남덕만이 살아가는 게 고통스럽다고 생각하오? 모든 사람도 다 마찬가지로 괴로운 거요.


이중섭이 아내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렇게 부정적인 마음을 드러낸 적은 거의 없다. 하지만 추앙한다고 해서 늘 저자세일 수만은 없지 않은가. 얼마나 서운했으면 그랬을까 싶어 이런 투정이 인간적이고 순수해 보이기까지 한다. 다음 편지를 보면, 이렇게까지 해서 편지를 받아낸 머쓱함과 무안함도 잘 드러난다.

5월 15일 자 편지와 사진 두 장 잘 받았소. 진심 어린 편지를 몇 번이고 되읽어보면서 안심하고 있소. 내가 좀 신경질적인 내용을 써 보내더라도 기분 상하지 말아주오. 오직 당신만을 열렬히 사랑하는 까닭에 당신에게만 격렬한 요구를 하게 되는 거요.


전화도 문자도 이메일도 없던 시절. 바다 건너에 있는 가족과의 유일한 연결선이 편지이다 보니 그 한 통 한 통이 얼마나 귀하고 간절했을지 충분히 상상이 된다. 당장 달려가서 꼬옥 안아주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편지로 달래며 수년을 견딘 이중섭과 남덕. 하늘에서는 두 사람이 서로 추앙하면서 영원히 함께 하기를 빌어본다.


 

춤추는 가족(왼쪽)과 길 떠나는 가족(오른쪽). 몸은 비록 떨어져 있었지만 마음만은 언제나 가족과 함께였다.



이미지 출처:


http://www.daejonilbo.com/news/articleView.html?idxno=1075554

https://www.chosun.com/site/data/html_dir/2016/09/23/2016092301292.html


http://happy.designhouse.co.kr/magazine/magazine_view/00010005/4906


https://news.kbs.co.kr/news/view.do?ncd=3268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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