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식년 끝. 연구년 시작.
오늘은 우리 대학의 개강일이다. 연구년이 아니었다면 나도 지금쯤 강의실에서 학생들을 만나 인사하고 강의의 목표와 수업 진행 방식, 성적 산출 방법과 주의사항 등을 설명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번 학기는 다르다. 강의계획서도 강의 준비도 필요 없다. 강의실 기자재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을까 봐 조마조마할 필요도 없다.
그렇다고 남들 다 바쁘게 뛰고 있는 날 집에 앉아있자니 뭔가 죄짓는 기분이 들어서 어제는 집 근처에 공유 오피스를 하나 신청했다. 이름은 집무실. 멋지지 않은가? 젊어서는 사무실, 최근 10여 년은 연구실로 출근했는데 오늘부터는 집무실로 출근해 보려고 한다. 대통령이 아니라도 누구나 집무실 하나쯤은 필요한 거 아닌가?
집무실은 이 동네에 집을 보러 왔을 때, "우와~ 이건 뭐예요? 근사하다!" 하며 눈여겨본 상업시설이었다. 간판에 한자로 執務室이라 써놓았는데 (자랑스럽게도) 읽을 수가 있었다. 그래도 나와 상관없는 곳이려니 하며 그냥 지나쳤었는데 브런치에서 엘프작가라는 분이 집무실 투어를 하고 올린 글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어제 바로 검색을 해서 앱을 다운받고, 무료 체험을 신청하였다. 당장 와 보고 싶었는데 회원 승인이 나기 전에는 들어올 수 없었다. 급한 성격에 달려와 보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다. 아, 정말 모냥 빠진다. 어쨌든 퇴근 무렵에는 승인 알람이 왔고, 그렇게 해서 9월 1일부터 나는 집무실로 출근하는 사람이 되었다.
집무실은 일단 우리 집보다 한~~~참 더 넓고, 환하며, 인테리어도 고급지다. 냉난방도 알아서 해주고 커피와 음료도 준비되어 있다. 음악도 방해되지 않을 만큼 은은하게, 기분이 좋을 정도로 흘러나온다. 사람들은 각자 일하기도 하지만 방음이 되는 방에서 회의도 하고 전화도 한다. 이들이 다 나와 무관한 사람들이니 경쟁이나 비교 스트레스도 없다. 한 마디로 아주 분위기 좋은 회사에 나온 것 같다. 더구나 오늘은 9월의 첫날답게 하늘이 높고 햇살은 따뜻하며 바람이 살랑살랑 부는 초가을 날씨인데, 하얀 시폰 커튼이 쳐진 통창을 통해 그 날씨가 그대로 느껴지기까지 한다. 이런 곳에 올 생각을 한 나 자신, 아주 칭찬한다.
일단 오늘은 두 달 동안 푹 쉬면서 빠져나간 감을 찾기 위해 최근에 발표된 연구 논문들을 찾아보려고 한다. 전에도 얘기했듯이 연구년을 안식년으로 알고 푹 쉬었다가는 "영영 푹 쉬세요~"라며 퇴직 권고를 받을 수도 있는 것이 요즘 교수들의 처지이다. 그럼 이제부터 업무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