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머리 없는 엄마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을까
일을 마치고 나와 광화문앞 지하도를 걷고 있는데, 나보다 몇 미터 앞서 가시던 할머니가 갑자기 쿵하고 쓰러지셨다. 앞이나 옆으로 넘어졌다면 손으로 바닥을 짚기라도 했을 텐데 정확하게 뒤로 넘어지셔서 머리를 다친 게 아닐까 걱정하며 달려갔다. 다행히 등에 백팩을 메고 계셔서 머리를 세게 부딪히지는 않은 것 같았다.
광화문 광장 홍보 부스에 나와있던 건장한 남자 직원도 뛰어와서 할머니 상태를 같이 살폈다. 말씀은 못하셔도 의식이 있어 보였고 호흡이나 심장 박동에도 이상이 없어 보였다. 남자분이 119에 신고를 하는 동안 나는 할머니 웃옷에 단추와 허리띠를 풀고, 꽉 조이는 장치가 달린 트래킹 슈즈도 벗겨 드렸다. 마스크도 살짝 내려서 코와 입이 노출되게 해 드렸다. 손목에 시계도 느슨하게 풀어드렸다. 모두 호흡과 혈행을 쉽게 해 드리려는 뜻이었다. 정신이 없는 할머니 입장에서 혹시 누가 해코지 한다고 오해하실까 염려되어 손을 댈 때마다 무엇을 하는지 말씀드리고 걱정하지 마시라고 안심시켜 드렸다.
할머니는 곧 조금씩 회복이 되는지 다리를 접기도 하고 손을 들기도 했다. 손을 잡아드리고 팔도 주물러 드렸다. 할머니는 바닥에서 일어나고 싶으신지 나와 남자분의 손을 잡아당기셨다. 신발을 신고 일어서자마자 다시 한번 휘청하셨는데 이내 균형을 잡으셨다. 웃옷의 단추와 허리띠를 풀어드렸으니 다시 채우시도록 말씀을 드리자 스스로 바지춤을 정리하셨다. 마음이 좀 놓였다. 물을 좀 드시겠냐고 권해 보았는데 손사래를 치며 사양을 하셨다.
이제 다 괜찮아지신 건가 싶었는데, 할머니는 갑자기 사람들이 다 어디 갔냐고 물으셨다. 쓰러지기 전에도 할머니에겐 동행이 없었는데, 누굴 찾으시는 건지 몰랐다. 아무래도 아직 정신이 다 돌아오진 않은 모양이었다. 광화문 광장 홍보 직원이 "할머니 아무래도 119 올 때까지 여기 계시다가 구급대원 만나보고 가셔야겠어요" 하며 부스로 모시고 갔다. 듬직한 큰 손자같아 보기에 참 좋았다. 마침 가지고 있던 꼬마 생수병을 할머니 손에 쥐어 드리고 꼭 119 만나고 가시라고 인사한 후 나는 집으로 향했다.
생각해 보니, 나는 이와 비슷한 상황을 러시아 여행 중에 본 적이 있었다. 가족과 함께 상뜨 뻬떼르부르크(St. Petersberg) 시내를 구경하고 있었는데 지하도 입구에서 어떤 할머니가 쓰러지셨다. 번화한 도심이었기 때문에 사람들도 많았고, 할머니 주변으로 몰려들어 상태를 살피고 도우려는 젊은이들이 충분히 많아 보였다. 나는 러시아어도 모르고, 119처럼 긴급 구조를 해주는 전화번호도 몰랐기 때문에 그 사건을 주목하긴 했지만 곧 가던 길을 갔었다. 내가 아니라도 할머니는 충분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상황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수개월이 지난 후, 나는 내 아이가 그 사건을 어떻게 기억하는지 알고 경악했다. 아직 어렸던 아이의 눈에는 내가 쓰러진 할머니를 보고도 돕지 않고 그냥 가버린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더구나 그 얘기는 나 자신이 길을 가다가 쓰러진 사건 때문에 듣게 되었다. 어느 날 아이와 남편을 주차장에 두고 혼자 마트에 잠깐 들어갔는데, 갑자기 정신을 잃고 쓰러진 것이다. 그때 매장에서 일하시던 어떤 아주머니의 도움으로 잠시 휴식을 취하며 정신을 차리고, 전화를 걸어 남편을 불렀었다. 내가 그날 얼마나 놀랐고, 도움을 준 사람들에게 얼마나 고마웠는지를 얘기하고 있는데 아이가 "엄마는 쓰러진 할머니를 보고도 그냥 갔는데, 사람들은 엄마가 쓰러졌을 때 도와줬다"는 취지로 말을 한 것이다. 너무 놀란 나는 러시아에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지만, 찝찝한 뒷맛은 오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오늘 광화문에도 아이와 함께 길을 가던 젊은 엄마가 있었다. 어리석었던 러시아에서의 나와는 달리 그 엄마는 가던 길을 멈추고 119에 신고는 하였는지, 상태는 어떤지 물어보았다. 홍보 부스에서 나온 젊은이와 내가 이미 구호 활동을 하고 있었으니, 그 엄마와 아이는 가던 길을 그냥 가도 되었다. 하지만 엄마가 그렇게 행동함으로써 아이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을 보았을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배웠을 것이다. 또, 우리 엄마는 좋은 사람이라는 믿음이 마음 깊이 자리 잡았을지도 모른다. 나도 오늘 아이가 집에 오면, 좀 구구절절하기는 하겠지만, 내가 광화문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자세히 얘기해 주려고 한다. 너무 오래 걸리기는 했지만, 드디어 내가 인정머리 없는 사람이라는 오명을 벗을 기회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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