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느님 Sep 05. 2022

참을 수 없는 추천의 가벼움

책임질 수 없는 추천의 위험성에 대하여

길을 가다가 요즘 국민 멘토로 통한다는 오은영 박사의 등신대를 만났다. 활짝 웃는 얼굴과 함께 "저 오은영이 자신 있게 추천합니다"라고 쓰여있다. 올레 tv 키즈랜드의 광고였다. 유튜브를 검색해 보니 동영상으로도 같은 광고가 제작되어 있고, 영상의 조회수는 4백만이 훌쩍 넘는다. 주목도 높은 TV 출연과 베스트셀러 출간 등을 통해 상당한 팬덤을 형성하고 있는 오은영 박사의 영향력은 실로 엄청나다. 육아 상담은 물론이거니와 어린 시절 경험한 심리적 문제를 그대로 안은 채 성인이 된 유명인들의 상담까지 해주면서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있다. 그런 분의 한 마디는 보통 사람의 말과는 다른 무게를 가진다고 감히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이름을 걸고 올레 tv 키즈랜드를 자신 있게 추천한다고? 의심이 많은 나는 오은영 박사가 도대체 무슨 근거로 이런 카피에 동의했는지 궁금하다.



오은영 박사와 같이 동문수학했던 많은 분들이 자신의 진료실에서 환자들을 만나고 있다. 그중에  분을 만나  가지 질문을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이분은  어떤 것도 단정적으로 말씀하시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유보적으로  마디  마디를 가려서 말씀하셨다. 오은영 박사처럼 자신 있게 말해 준다면 환자들에게  인기가 있었을 텐데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그리도 조심스럽게 말씀하시는지는 짐작이 간다.  또한 박사 과정을 밟는 내내 사람을 대상으로  연구 결과를 논의할 때는 유보적인 태도를 유지해야 한다고 귀에 못이 박히도록 배웠다. 사람을 대상으로 하는 연구에 100% 없으며, 오직 통계적으로   그럴 확률이 높을  모든 사람에게  적용될  있는 연구 결과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논문에는 it seems that(~ 것으로 보인다), is likely to(~ 가능성이 있다), tends to(~하는 경향이 있다), would(~  있다), might (어쩌면 ~ 수도 있다) 같은 표현을 쓴다. certainly(확실하게), absolutely(절대적으로), must (반드시 ~해야 한다), will ( ~ 것이다) 같은 단정적인 표현은 되도록 쓰지 않는다.


내가 공부한 분야는 아니지만, 정신의학도 마찬가지 일 것이라고 생각한다. 같은 치료법을 쓰더라도 어떤 사람한테는 효과적이고 어떤 사람에게는 효과가 없을 수 있다. 일례로, 조현병을 치료하던 정신과 의사가 자신의 환자에게 죽임을 당한 비극적인 사건이 있었다. 그분이 평소 얼마나 헌신적이고 훌륭한 의사였는지는 많은 분들이 증언했었다. 그분이 그런 불행한 일을 당한 것은 진단을 잘못하거나 치료를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 환자에게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 치료법이 통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사람을 상대로 하는 일에 100%는 없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오은영 박사가 이 점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도 "아이 있는 집마다 올레 tv 키즈랜드"라든가 "저 오은영이 자신 있게 추천합니다" 같은  광고 카피에 동의하셨다는 것이 조금 실망스럽다. 광고는 광고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모델료를 지불한 KT나 그 광고를 보는 소비자들의 눈에 오은영 박사는 돈만 주면 아무 말이나 시키는 대로 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독보적인 전문성을 바탕으로 신중하게 판단한 결과를 말하는 사람, 말 한마디도 허투루 하지 않는 사람, 그래서 그분의 말씀이라면 무조건 믿고 따라도 되는 사람. 오은영 박사가 이 브랜드의 모델이 된 것은 이와 같은 대중의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이미 완성되어 출간된 책이나 상영된 영화라면 나름 "자신 있게" 추천을 할 수도 있다. 내가 직접 (두 번 세 번) 봤는데 이런 점이 좋고, 이런 면에서 감명을 받았다, 이런 사람들에게 권한다고 상당한 자신감을 가지고 말할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나면 이런 추천을 철회하고 싶은 상황은 얼마든지 생길 수 있다. 예를 들어, 안녕 자두야라는 어린이 애니메이션이 10년도 더 된 에피소드 때문에 제재를 받은 일이 있다. "여자 얼굴이 그게 뭐냐," "공부 잘해도 못 생기면 결혼도 못하는 세상이야," "그러게 처음부터 예쁘게 낳아줬으면 됐잖아" 등의 대사 때문이었다. 2010년경 우리 사회는 이 대사들이 성차별적이며 어린이들에게 무분별한 외모지상주의를 조장한다는 생각을 못했을 수 있다. 하지만 2022년 대한민국에서는 이 대사들이 어린이 애니메이션에 부적절하다고 느끼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나도 그 시절 아이와 함께 이 애니메이션을 즐겨보곤 했는데, 누군가에게 공개적으로 추천하지 않은 것은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든다.


완성된 콘텐츠를 추천하는 데에도 이런 위험이 따르는데, 하물며 앞으로 어떤 콘텐츠가 방영될지 모르는 IPTV 브랜드를 자신 있게 추천한다는 것은 쉽게 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KT 홈페이지에 따르면, 키즈랜드는 오은영 박사가 직접 동화책을 읽어주거나 책을 이용한 육아법을 알려주는 콘텐츠도 일부 제공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오은영 박사와 무관한 영어놀이터, 영어클래스, 자연백과, 캐릭터 같은 콘텐츠도 얼마든지 있다. 자신이 출연하지도 않는 이 모든 콘텐츠를 오은영 박사가 다 검수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만약 키즈랜드에서 제공하는 콘텐츠 중에 아이들에게 유해한 내용이 발견된다면, 오은영 박사는 어떤 책임을 질 수 있을까? 내용상에 문제가 없다 하더라도 키즈랜드를 보는 아이들에게 미디어 과다 사용이나 과의존 문제가 생긴다면?




추천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오은영 박사뿐이 아니다. 광고는 물론이고, 일상생활 속에서 언제부터인가 추천을 너무 쉽게 여기는 문화가 생겨났다. 맛집 추천, 학원 추천, 병원 추천, 투자 종목 추천.... 예로부터 중매는 잘하면 술이 석 잔이요 잘못하면 뺨이 석 대라고 했다. 일반적인 사람들의 심리라면, 술 석 잔 얻어먹을 심산으로 뺨 석 대 맞을 위험을 감수하지 않는다. 그만큼 확신이 있을 때만 추천을 하라는 의미이다. 나도 심심찮게 추천 요청을 받는데, 맛집 추천이나 여행지 추천을 제외하고는 가급적 거절하는 편이다. 맛집과 여행지를 추천할 때에도 내가 직접 경험해 보고 정말 만족했던 경우로만 한정한다. 그럴 때에도, 나는 그랬는데 너는 어떨지 모르겠다는 주의의 말을 꼭 붙인다. 앞서 얘기했듯, 사람의 일에 100%는 없기 때문이다.


친구들의 추천으로 아이에게 한약을 지어 먹였다가 두드러기로 크게 고생한 적이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알고 지낸 친구 둘이 같은 한의원에서 약을 지어먹고 집안에서 아프다 소리가 싹 사라졌다고 했다. 한 친구는 평생 위장이 좋지 않았고, 그 아이들은 아토피와 비염으로 고생이 심했다. 다른 한 친구는 몇 년째 허리를 비롯해 여기저기가 아프다고 했었다. 그런데 이 친구 둘과 그 가족들이 다 그 한의원에서 약을 지어먹고는 거짓말처럼 몸이 좋아졌다는 것이다. 검색을 해보니 우리나라 한의학의 역사라고 할 수 있는, 무려 86년이나 된 한의원이었다. 그래서 수험생활로 건강이 많이 악화된 딸을 데려가 한약을 지어먹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 아이는 복약을 시작한 지 하루 만에 팔다리에 두드러기가 나서 피부과 치료를 받아야 했다.


이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를 두 친구에게는 아직 하지 않았다. 말을 하면 너무 미안해할 것 같아서이다. 그 친구들은 진심으로 나와 내 아이를 위해서 그 한의원을 추천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무척 안타깝다. 하지만 약을 먹고 두드러기가 난 것은 그 친구들이 의도했던 것도 아니고, 그 한의원에서 잘못해서 일어난 일도 아니다. 그러니 나는 친구들도 한의원도 원망하지 않는다. 자신이 직접 경험해 보고 확신에 차서 했던 추천도 얼마든지 좋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수 있다. 그러니, 남의 말만 듣고 하는 추천은 어떻겠는가? 추천에 신중을 기해야 하는 이유다.


추천을 얼마나 쉽게 하는지는 성격의 문제일 수도 있다. 사람들 중에는 온갖 사소한 것부터 상당히 중요한 일까지 요청하지 않아도 자발적으로 추천하는 이들이 있다. 반면 어떤 사람은 추천 좀 해 달라고 여러 차례 부탁을 해야 조심스럽게 그나마도 여러 가지 조건을 달아 추천을 해준다. 마치 약 광고나 주식 종목 추천 프로그램에 주의사항 문구를 붙이는 것처럼. 전자에 해당하는 사람들은 시원시원하다는 평가를 받고 인기가 있다. 후자에 해당하는 사람은 답답하고 재미가 없다는 소리를 들을 수 있다. 하지만 돈 받고 쓰는 후기와 가짜 뉴스가 난무하는 세상에서 나는 추천이 조금 더 신중해졌으면 좋겠다. 한약 먹고 두드러기로 고생한 이야기와는 달리, 차마 여기에는 쓰지 못하는 추천 실패담이 아주 많기 때문이다.




사족: 혹시나 싶어 덧붙이건대, 전화로 사정을 들은 한의원에서는 기꺼이 약값을 환불 처리해 주었을 뿐 아니라 아이의 증상을 다스릴 수 있는 다른 방법들도 추천을 해주셨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들이 아프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