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느님 Sep 17. 2022

처음 해 보는 남편 자랑

오늘 하루 팔불출이 되어 보겠습니다.

혹시 오해할까 싶어 미리 말해 두자면, 나는 경력 20년의 베테랑 운전자이다. 서울 시내 웬만한 골목길도  미끈하게 잘 빠져나갈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당황하게 만드는 상황이 간혹 있는데 모두 주차와 관련된 것들이다.


오늘 아침에는 아이를 태워다 주러 나갔는데, 내 차 앞으로 신형 제네시스가 이중 주차 되어 있었다. 우리 집 지하주차장은 상당히 협소하여 이중 주차하는 경우가 드문데, 아마도 밤늦게 들어와 다른 어디에도 주차할 공간이 없었나 보다. 차주를 불러 차를 이동시키자니 시간이 너무 빠듯하였다. 그런데 시야를 좀 넓혀 보니 남편 차는 앞이 시원하게 개방되어 바로 출차를 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 나는 재빨리 남편을 불러 아이를 남편 차에 태워 보냈다.


한편 저녁에 아이를 데리고 돌아오니 지하 주차장에 자리가 없다. 가장 좁은 주차칸만 하나 비어 있고, 내가 주차했던 자리는 이미 누군가가 차지한 뒤였다. 급하게 호출을 받은 남편이 내려와 상황을 훑어보더니 창의적인 제안을 한다. 자기 차를 좁은 주차칸으로 이동할 테니 그 자리에 내 차를 주차하라는 것이다. 혼자 출퇴근용으로 사용하는 남편의 차가 가족용으로 쓰는 내 차보다 상대적으로 작기도 하고, 남편의 주차 솜씨가 나보다 낫기 때문에 아주 훌륭한 방법이었다.


올해로 결혼 20년이 되었지만, 남편과 나는 학업과 직장 문제로 긴 세월 떨어져 살았다. 올해 아이가 재수를 하고 내가 연구년을 얻은 덕분에 두 달째 한 집에서 생활하고 있다. 급하게 얻은 좁은 집에 간신히 세간을 채우고 살자니 사뭇 신혼부부 같다고 생각도 해 보았지만, 스무 살짜리 딸과 내 얼굴에 가득한 주름을 보면 어디까지나 착각일 뿐이다. 그래도 오랜만에 월화수목금토일 부부가 한 집에 살게 되니 여러모로 좋은 점이 많다.


첫째로 오늘처럼 주차장에서 예상치 못한 상황이 벌어질 때 남편이 대타로 뛰어줄 수 있다. 남편과 떨어져 살 때는 카니발 같은 커다란 차가 이중 주차되어 있으면 생판 모르는 이웃에게 부탁하여 같이 밀기도 하고, 그나마도 여의치 않아 약속에 늦은 적도 있었다. 하루에 두 번이나 주차 때문에 곤란한 일을 남편의 도움으로 해결하고 나니 그렇게 든든할 수가 없다.


남편과 함께 사니 '으른의 맛'을 더 자주 먹을 수 있다. 아이가 나를 닮아서 소화력이 좋지 않은 데다가 매운 음식을 먹기 힘들어한다. 덕분에 아이와 둘이 사는 동안에는 나도 늘 이유식이나 환자식 같은 슴슴한 음식만 먹게 된다. 얼큰한 김치찌개나 매콤한 제육볶음이 당기는 날에도 아이 음식과 내 음식을 따로 마련하기 힘들어서 그냥 참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오늘 점심에는 아이가 없는 틈을 타서 남편과 김치찌개와 제육볶음을 먹으러 나갔다.


남편은 음식에 진심인 편이라 유튜브로 백종원, 승우아빠, 고든 램지 요리를 찾아보는 것은 물론이고 EBS 최고의 요리비결까지 챙겨본다. 또 이렇게 해서 배운 요리를 기회가 날 때마다 직접 만들어 보고 전공을 살려 이런저런 실험을 통해 레시피를 개선한다. 이런 남편과 함께 살다 보니 나는 요리 재료를 구해 다듬어서 준비만 해놓으면 된다. 남편이 진지하게 굽고, 찌고, 끓이고, 볶고, 튀기는 동안 나는 느긋하게 상을 차리기만 하면 된다. 대신 장을 보러 갈 때마다 남편에게 메뉴 계획을 문의해야 하고, 신선하고 질 좋은 재료를 눈으로 직접 보고 골라야 한다. 요즘은 새벽배송, 쓱배송이 대세임에도 내가 마트에 직접 가는 이유이다.  


남편이 함께 있으니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훨씬 수월해졌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여행기 먼 북소리를 보면,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하는 아내를 위해 아침 식사는 늘 하루키가 준비한다는 얘기가 나온다. 남편도 젊어서는 나보다도 더 아침에 일어나기 힘들어했는데, 오랜 회사 생활 덕에 이제 평일 아침에는 나보다 더 잘 일어난다. 혹시 애를 학교에 지각시킬까 싶어 잠을 푹 자지 못한 세월이 너무나 길었는데, 요즘은 남편을 믿고 아침까지 잘 수가 있다.


언제나  진지한 편인 나와는 달리 남편은 인생을 즐기며 사는 편이다. 언제  들래? 하는 남들의 말은 뒷등으로 듣고 레고도 하고 게임도 한다. 덕분에 나는  번씩 마음으로 혀를 쯧쯧 차게 되지만, 그래도 가족이 같이 즐길 만한 놀이를 꾸준하게 소개해 주니 함께 하는 시간이 즐겁다.  스마트폰에   되는 게임 앱은 모두 남편이 깔아준 것인데 매일 같은 게임을 하며 누가 먼저 문제를 풀었나 경쟁도 한다. 또는 아이까지 포함하여  식구가 협업으로 하는 게임을 통해 "우리 셋이 모이니 못할  없구나!" 하며 가족애와 자신감을 고양시키기도 한다.


고등학교 동창인 동갑내기 남편과 결혼하여 20년을 살면서 답답하고 한숨 나는 일도 사실 많았다. 친구들을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승승장구 출세가도를 달리며   벌고 듬직한 친구 남편과 비교되는 마음이, 말은  했지만, 나를 괴롭히기도 했다.* 예로부터 남편 자랑 자식 자랑은 팔불출이나 하는 거라고 했던 이유를 충분히 헤아릴 만하다. 그런데 오늘 하루 나의 호출에  번이나 지하 주차장으로 달려오고, 자기는 저녁 생각이 없으면서도 나를 위해 LA갈비를 구워주고, 내가 텐트 밖은 유럽에서 토스카나에 도착하는 장면 보라고 했더니  시간째 이제나 저제나 기다리며 보다가 드디어  장면이 나오자  집안이 떠나가게  소리로 감탄을 쏟아내는  남편이 무척 맘에 든다. 부끄럽지만 오늘 처음으로 남편 자랑을 해본다.  



*저의 남편 자랑 때문에 독자분의 남편이 봉변을 당하는 일이 없기를 기도합니다.




이미지 출처: https://unsplash.com/@jonathanborba?utm_source=unsplash&utm_medium=referral&utm_content=creditCopyText 


매거진의 이전글 참을 수 없는 추천의 가벼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