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으로 브런치에 글을 올린지도 20일이나 되었다. 그동안 매주 1-2편을 꾸준히 올리다가 갑자기 절필(?)을 하니, 친절하게도 브런치에서 "작가님의 꾸준함이 재능으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로 시작하는 응원의 메시지를 보내 주었다. 그런 메시지를 받아도 하고 싶은 말이 영 떠오르지 않고, 쓰고 싶은 욕구도 솟아오르지 않아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마비된 것은 글쓰기 역량뿐이 아니었다. 말하기 역시 영 신통치 않다. 어제는 오랜만에 내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꽤 긴 시간을 보냈는데, 시야가 흐릿하고 귀가 먹먹한 데다, 적절한 단어도 잘 생각나지 않아서 나의 발화가 아주 어눌하게 느껴졌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톡 실력만은 녹슬지 않아 집에 돌아온 후에 카톡으로 할 말을 마쳤다.
갑자기 찾아온 실어증(언어 능력을 상실한 증상)은 흥미롭게도 싫어증(아무것도 하기 싫은 증상)을 동반했다. 아침에 일어나기도 싫고, 밥 차려 먹기도 귀찮고, 씻고 단장하는 것도 내키지 않고, 사람 만나기도 부담스럽다. 오늘은 뭘 할까 주말엔 무엇을 할까 계획도 세우지 않는다. 오늘 저녁에는 백만 년 만에 옛 직장 동료들과 송년 모임이 있는데, 처음 약속을 잡던 순간의 설렘과 기쁨은 어디로 가고 모든 감각과 감정이 둔하게만 느껴진다.
마지막으로 썼던 브런치 글을 보니 딸아이가 첫 논술 시험을 보고 온 이야기였다. 로또 전형이라고 불리는 대학 입시 논술 전형은 결과가 나올 때까지는 아무도 모른다는 얘기와 첫 논술 시험에서 단단히 충격을 받은 딸아이가 남은 시험을 거부한다는 내용이었다. 다행히 아이는 그다음 일주일 동안 열심히 준비하여 세 곳에 더 응시를 했고, 첫 시험과는 달리 만족스럽게 답안을 작성하고 나왔다. 그러고 나서 무슨 일이 있었길래 나는 아무 글을 쓰지 않았을까.
작가의 서랍을 열어보니 완성하지 못해 끄적이다 말고 저장해 놓은 글이 있다. 남은 논술 고사를 마무리하고 난 소회를 적은 글이었다. 아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했지만, 아직은 결과를 기다리는 시점이라 글을 쓰다가 끝맺음을 못한 모양이다. 내가 쓰다 만 글인데도 그 시간 내 생각의 흐름이 어땠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실어증, 싫어증과 더불어 인지 능력도 크게 손상된 것일까.
10년 전쯤 이와 비슷한 상태를 경험한 적이 있다. 미국 생활을 정리하고 한국에 정착하려고 애쓰던 과도기였다. 미국에서 근무하던 대학에는 이미 사직서를 제출했고, 한국에서 지원한 대학에서는 아직 최종 선발이 되기 전이었다. 나는 이사 온 집 아파트의 현관 비밀번호를 도무지 외울 수가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기억력 하나는 둘째 가라면 서러운 사람이 나인데, 1층 현관 앞에 서서 문을 열지 못하는 경우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간신히 1층을 통과하면 이번엔 내 집 현관 비밀번호가 또 생각나지 않았다. 세상으로부터 단절된 듯한 멍한 느낌. 온몸과 눈과 귀가 택배 포장용 뽁뽁이에 여러 겹으로 둘러싸인 것 같은 이 느낌이 그때와 비슷하다.
굳이 공통점을 찾자면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손 놓고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일이 없는" 무기력한 상태이다. 더 이상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고, 오직 결과만을 기다리는 시간. 그때 나는 딱 한 학교에만 지원을 했기 때문에 거창하게 말하자면 배수의 진을 친 것이었지만, 그렇다고 장렬하게 싸울 전투가 남아있는 것도 아니었다. 교수 채용은 뜻밖에도 대학 입시 수시 전형과 비슷해서 지금까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이루었느냐가 문제이지 선발 시점에서 무엇을 얼마나 잘하느냐는 아무런 차이를 만들지 못한다.
나는 만약의 경우를 대비한 플랜 B를 찾아보다가 박사 학위와 사기업 경력을 인정해 주는 민간 경력자 5급 공무원 공채를 알게 되었다. 기출문제집을 한 권 사서 풀어보니 1차 시험에서 과락하지 않을 자신은 있었다. 하지만, 최종 합격한 과거 사례들을 보니 경력이 나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화려했다. 어쨌든 맥 놓고 앉아 있으면 실어증과 싫어증이 친구 하자고 달려드는 바람에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1차 시험을 봤었다.
이야기의 흐름상 최종 임용 결정이 나면서 나의 실어증과 싫어증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고 해야겠지만 그런 드라마틱한 기억은 없다. 지금 몸 담고 있는 대학에서 최종 임용 통보를 받고, 가족과 절친들에게 기쁜 소식과 감사의 인사를 전했던 것은 기억한다. 하지만 갑자기 총기가 회복되면서 모든 감각이 선명해지고 말과 글이 유창해지는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무더운 여름 내내 은행과 관공서를 들락거리고, 내 명의로 된 핸드폰과 작지만 믿을 수 있는 새 차를 구입하면서 겨우겨우 한국에서 살아갈 준비가 끝나니 어느새 첫 학기가 시작되었고, 정신을 차려보니 실어증도 싫어증도 조용히 사라지고 난 뒤였다.
이번에 찾아온 실어증과 싫어증은 어떻게 돌려보낼 수 있을까? 오래전 그때처럼 기다리던 좋은 소식이 천천히나마 이 친구들을 떠나게 해 줄까? 아이의 합격 소식이 들려오고, 지낼 곳과 입을 옷가지 등을 마련하여 대학이라는 곳으로 떠나보내고 나니 어느새 실어증과 싫어증은 사라지고 없었다, 라고 회고할 날이 올까?
수능 성적 발표까지 이틀, 수시 합격자 발표까지 여드레가 남았다. 그때까지 이런 상태로 있을 것을 생각하니 끔찍하다. 어떻게든 몸을 움직여서 씻고 단장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친구들도 만나러 나가야겠다. 이렇게나마 몇 줄 적고 나니 조금은 기운이 나는 것도 같다. 우선은 씻으러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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