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시 논술 전형을 치르며
수능이 끝나고 24시간 만에 재수생 딸은 논술 특강을 들으러 갔다. 일명 로또 전형이라고 하는 수시 논술 전형에 원서를 넣었기 때문이다. 3시간짜리 특강이 얼마나 큰 도움이 될까마는, 그나마도 없이 치른 작년의 논술 전형에 아쉬움이 많아, 무거운 몸을 이끌고 밤 10시까지 특강을 들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해도 뜨기 전에 8시 30분까지 입실해야 하는 논술 시험을 보러 길을 나섰다. 논술 전형은 경쟁률이 높기로 유명하여, 해마다 성균관대학교 논술 시험이 끝나고 인산인해를 이루며 몰려나오는 수험생들의 사진이 뉴스를 장식한다. 올해는 이태원의 참사가 있었던 탓인지 아이가 지원한 대학에서는 시험장을 여러 곳으로 분산시켰다. 그렇다 해도 입실 시간 임박해서는 교통 정체가 극심할 것이 뻔해서 한 시간 이상 일찍 도착할 수 있도록 새벽같이 출발을 했다.
시험장은 멀기도 어지간히 멀어서 원활한 교통 상황에도 50분 이상 운전해야 도착할 수 있는 곳이었다. 아침 식사도 차에서 먹으며 달려온 덕분에 꽤나 일찍 도착했는데, 우리보다도 먼저 온 수험생들이 교문 앞에 벌써 줄을 서고 있었다. 아직 입실이 허락되지 않는 모양이었다. 안 그래도 컨디션이 저조한데 줄 서서 기다리다가 감기라도 걸릴까 싶어 가까운 마트 주차장에 가서 잠깐 시간을 보냈다. 8시에 맞춰 다시 시험장에 가니 입실이 시작되고 있었다. 아이를 들여보내고 집으로 갈까 했는데 남편이 굳이 시험장 근처에서 끝날 때까지 기다리기를 원했다.
시험장 근처의 스타벅스를 찾아 들어가니 우리 같은 중년 부부들이 많았다. 다들 논술 고사장에 아이를 들여보낸 학부모 같았다. 옆 테이블의 부부는 손에 수험생 유의사항을 들고 있었으니 의심할 여지도 없었다. 우리도 그렇지만 평소 대화도 별로 없던 중년의 부부가 자식의 입시 덕분에 마주 앉아 있으니 어색한 기운이 감돈다. 누군가는 들고 온 책을 보고, 누군가는 핸드폰 게임을 한다. 어떤 어머니는 세 시간 내내 성경을 읽는다. 우리는 철 지난 MBTI 얘기, 어제 입금된 남편 포상금 얘기(살다 보니 이런 일이!), 주변 사람들 코로나 감염된 얘기를 하며 커피도 마시고 베이글도 하나씩 먹으며 시간 가는 줄 모르다가 어느새 시험 종료 시간이 되었다.
아이를 마중하러 시험장 쪽으로 걸어가는데 아이한테 전화가 왔다. 사진에서 본 성균관대학교 논술 고사 종료 장면만큼은 아니라도 인파가 대단했다. 어디서 어떻게 만날지를 전화로 설명하다가 다행히 아이를 만났다. 아이는 화가 잔뜩 나서 자기는 논술에 가망이 없다고 했다. 두 시간 안에 길고 긴 일곱 개의 지문을 읽고, 800자짜리 글 하나와 1100자짜리 글 하나를 원고지에 써내는 것은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했다. 생각이 빨리빨리 떠오르지도 않을뿐더러 손도 빨리빨리 움직이지 않는다고 했다. 자기가 작성한 답안은 시험이 요구하는 분량 근처에도 가지 못 했다고 했다. 너무 자존심이 상하고 화가 나서 얼른 그 자리를 벗어나고 싶어 했다.
들어보니 마치 내가 초등학교 운동회에서 달리기 대회에 나갔다가 들어올 때의 그 기분 같았다. 내가 달리기를 잘 못한다는 것을 나도 알고 선생님도 알고 부모님도 다 아는데, 그래도 어쩔 수 없이 나가 달리고 꼴찌로 들어오는 그 기분 말이다. 아이는 어젯밤 특강에서부터 자신이 논술로 대학에 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고 느낀 모양이다. 그런데 차마 그 말을 하지 못해 오늘 새벽부터 엄마 아빠까지 대동하여 시험을 보러 왔다. 시험지를 받고 보니, 예상대로 자신이 잘할 수 있는 그런 시험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래도 중간에 나갈 수는 없어 세 시간을 꼼짝없이 앉아있다가 나오는 것이다.
처음에는 아이를 달래 보려고, 논술이란 누구도 완벽한 답을 쓸 수 없는 시험이며 다른 애들도 비슷할 것이다, 뚜껑 열어보기 전엔 아무도 모른다, 평가는 채점자가 하는 것이지 넌 그런 생각 안 해도 된다고 말했다. 그런데 아이는 그런 말로 달래질 상황이 아니었다. 아이는 자신의 한계를 깨달았다고 선언을 하고, 좌절감을 있는 그대로 표출했다. 남아있는 논술 전형도 응시할 필요 없고 응시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아이는 원래 자신이 경험한 좌절에 대해 쉽게 털어놓지 않는 편이라 이런 반응이 솔직히 무척 반가웠다. 말없이 혼자 괴로워하는 것보다 이렇게 표출을 하는 것이 훨씬 건강하기도 하고, 내 입장에서는 아이를 이해하고 위로하고 격려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아이는 이렇게 불평을 하는 동안 내 손을 꼭 붙잡고 있었다. 차에 타더니 손이 시리다고 두 손을 다 잡아 달라고 했다. 피곤이 쏟아지고 길마저 막히자 쓰윽 내 무릎을 베고 누웠다. 햇볕이 눈에 떨어지자 내 손을 가져다가 햇볕을 가렸다. 그렇게 좌절하고 상심하고 하면서도 "나는 엄마한테 사랑받을 자격이 없나 봐" 같은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분명했다. 그 점이 정말 마음이 놓였다. 나는 한 손으로 아이의 눈을 덮고 다른 한 손으로 머리를 쓰다듬으며, 아이들에게 이렇게 힘든 세상을 만들어 놓은 어른의 미안함을 들려 주었다.
길이 많이 막힌 덕분에 집에 도착할 때쯤에는 아이의 마음이 많이 풀려 있었다. 점심은 남편의 제안대로 피자를 배달시켜 먹었다. 오후 내내 아이와 남편은 새로 나온 스타워즈 시리즈를 보았다. 나는 수험생 엄마인 친구들에게 논술 시험 후기를 전하고 까무룩 잠이 들었다. 한숨 자고 일어나도 아이와 남편은 여전히 스타워즈를 보고 있다. 침대에 누워 남은 논술 시험을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한다. 어차피 로또라는 것을 알고 지원한 것인데, 로또를 샀으면 긁어는 봐야 하지 않을까? 다음 논술 시험까지 일주일이 남았다. 그동안 특강을 들으며 열심히 준비하면 다음 시험은 훨씬 나을 듯도 한데, 아이를 어떻게 설득할 것인지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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