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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트윈플레임 Jun 19. 2023

기억하니? 우리의 여름밤

백PD 내 친구요청 좀 수락해 줘

고등학교 때,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시간이었다.

대부분의 친구들과 집으로 가는 방향이 반대였기 때문에 같은 방향으로 가는 단 한 명의 친구와 서로 의지하며 하교를 함께 했다. 그날도 자율 '학습'의 목적과는 다르게 자율적으로 책을 보고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무더운 낮시간과 달리 밤에는 뜨거운 햇빛도 없고 바람도 살짝 불어 뜨거웠던 낮의 열기를 날려 보내주었다. 우리는 매일 학교에서 만나서 이야기를 했지만 이야기는 늘 해도 끊이지 않았다. 버스를 타고 가기에는 우리가 아직 해야 할 말이 너무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에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는 좀 더 천천히 집으로 가는 방법을 선택했다. 버스가 아닌 걸어서 가기. 

오르막길 끝에 있는 학교의 장점은 집으로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라는 것이다.


집에서 학교까지의 거리는 대략 2.5km 정도. 걸어서 집에 가면 천천히 걸어서 35분에서 40분 정도 걸린다. 산책하듯이 집으로 걸어가며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많이 했을까.

그 해 여름 내내 계속 걸으면서 이야기를 했다. 여름방학 때는 굳이 하지 않을 것이 뻔한 공부를 하겠다며 학교에 나와서 늘 집까지 걸어서 갔다.


자세한 내용은 이제는 거의 기억이 나지 않지만 고등학생이었던 만큼 미래에 대한 꿈에 대하여 많이 이야기했던 것 같다. 뭘 좋아하는지, 뭘 하고 싶은지, 어떤 건 재미있고, 어떤 건 재미없고. 뭐가 답인지는 알 수 없었으나 그 당시에는 뭐든지 다 이루어질 것만 같았다. 


특별히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없는 나와 달리 친구는 좋아하는 것이 명확했다. 영화도 좋아하고, 음악도 좋아하던 친구는 방송에 관심이 많았다. 나보다 훨씬 미적 감각이 뛰어난 친구를 보며 동경을 했던가, 그저 흥미롭게 바라봤던가. 그 꿈이 멋져 보였고, 꼭 이루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 해 여름은 지나갔고,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게 고등학교 생활은 끝이 났다.

친구와 나는 서로 다른 지역으로 대학진학을 했고, 20대의 바쁜 청춘들은 그렇게 자기 눈앞에 벌어진 다른 일들에 관심이 팔린 채 옛 친구와 멀어져 갔다.



40대의 어느 여름밤.

문득 예전 친구와 걸어가던 그때와 비슷한 온도, 바람을 느끼게 되었다.

함께 걷던 친구가 그립다. 그녀는 지금 뭘 하고 있을까.


연락처도 없고, 우리 둘 다 고향을 떠나와서 집도 모르고, 아는 건 그저 이름밖에 없는데.

혹시나 싶어서 이름이 특이한 친구를 인터넷 세상에서 찾아보았다.

특이한 이름인데도 동명이인이 엄청 많다.

그래도 끈기를 가지고 이곳저곳을 뒤져본다.


프로필 사진에 살짝 옆모습만 공개되어 있는데 분명 그녀가 맞다! 

그녀는 뭔가 방송기기로 보이는 음향기기 앞에서 서류를 보고 있다.

조금 더 정보를 뒤져보니 그녀는 지역의 어느 방송국의 PD가 되어있다.

SNS에서 친구요청을 해보았지만 이미 몇 년 전의 피드에서 멈춰있는 그녀는 이 요청을 볼 확률이 매우 낮아 보인다.


그래도 아무렴 어떤가.

내 친구가 꿈을 이뤘구나.

그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뿌듯하고 가슴 벅차다.


그 친구는 나를 어떻게 기억할까. 우리가 그 여름 내내 했던 이야기들을 기억할까.

교복을 입고 책가방을 메고 내리막길을 걸어서 술에 취한 대학생들 틈을 헤치며 집으로 오던 길.

그때에는 나의 40대를 상상할 수 없었는데.

이렇게 지금 나는 우리의 10대를 추억하고 있구나.

싱그럽고 아직은 덜 여문 우리의 그 시절. 


내게도 그렇게 아름답고 때론 부끄럽고 유치했던 시절이 있었음을 다시 상기시켜 준 여름밤의 공기.

어느 날 문득 떠오른 우리들만의 감성. 

우리가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꼭 기억할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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