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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순복 Dec 04. 2021

다시 쓰는 마음 29

우리 동네

마음이 싱숭생숭할 때는 주로 걷는 편인데, 그럴 땐 서너 시간도 걷는 것 같다.

무작정 걷는 건 또 아니고, 집에서 시작해 어린 시절에 살던 동네로 간다.

현재 사는 집이 북구고, 예전에 어렸을 때 살았던 집이 동구니까, 왕복으로 서너 시간이 걸리는 거리다.     

실은 더 먼 곳도 있지만, 내 기억에 있는 어린 시절이 있는 곳으로 간다.

유치원도 있었고, 슈퍼도 있었고, 연탄 집도 있었던 나의 어린 시절이 오롯이 담긴 곳으로.     

지금은 그곳에 아무것도 없다.

예전에는 다닥- 거리며 작은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고, 겨울이면 거의 모든 집에서 연기가 폴폴- 나고는 했던 동네인데, 지금은 거의 사라지고, 몇 개만 남았다.     

큰 건물은 아니고, 원룸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인쇄소가 즐비해 있는 곳으로 변했지만, 그래도 골목의 형태는 아직 그대로다.     

그곳엔 어린 시절의 내가 있다.

저 끝에서는 자전거를 배운답시고, 두 발 자전거를 타다가 넘어져 턱이 깨진 내가 있고, 그 앞집에서 키우던 백구한테 물릴 뻔한 내가 있고, 기타를 치던 고등학생 오빠가 살았던 집으로 놀러 간 내가 있다.     

흔적들이 곳곳에 남아 있지만, 그 흔적은 나만 볼 수 있다.

익숙한 모양들이 어느새 눈에도, 마음에도, 머리에도... 그리고 손 끝에도 그려진다.

나의 동네에 살던 어른들이 또 따라 나온다.     

유독 내가 살던 곳에 나가요, 언니들이 많았다.

술집 작부들이었는데, 그들도 가난했던 시절이었고 채소가게를 하던 나의 엄마가 담근 김치를 좋아하던 언니들이 있었다.     

그 언니들은 동생들이 생각난 건지, 아니면 자신들이 버리고 온 자식이 생각난 건지 모르겠지만, 아니면 우리 엄마의 김치가 맛있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집 앞에 있는 슈퍼에서 아이스크림이며 과자를 사들고 와서 나와 동생에게 주었던 기억이 난다. 그걸 맛있게 받아먹었던 나의 모습도 있다.     

또 동네에서 공부 잘하기로  소문난 옆 집 오빠가 나의 손을 잡고 유치원 놀이터에서 그네를 태워주던 모습도, 그 오빠의 불량 동생이 나에게 자전거를 알려준다면, 오르막길에서 손을 놔서 온 몸에 상처를 입어서 아버지한테 혼나던 모습도.     

모두 그곳에 있다.

동네의 집들이 마냥 내 집인 것처럼, 들어가서 밥을 먹고, 과자를 먹고, 놀아주던 어린 시절의 내 동무들도, 언니 오빠들도 있다.     

그리고 젊은 시절의 엄마도, 아버지도 모두 그곳에 있다.     

그곳을 한참을 보고 오면,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울컥 울컥으로 변한다.

이제는 아무도 없고, 익숙한 누구도 그곳에 살지 않는다.     

마치 응답하라 1988의 마지막 장면처럼... 그렇게 스쳐 지나간 곳에는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그곳을 기억하는 내가 있을 뿐.     

그때의 내가 다시 자전거를 탄다.

턱에는 반창고를 붙이고, 무릎은 깨져서 딱지가 붙어 있는 나다.     

그리고 지금의 내가 그곳에 다시 섰다.

어린 시절엔 너무나도 높게만 보이던 오르막길이, 내 서너 걸음의 오르막이라는 것을 이제는 안다.     

그때는 다쳐도, 아파도, 넘어져도, 부러져도 다시 일어나고, 얼른 나가서 놀고 싶었던 마음이 간절했는데, 지금의 나는 다치면 아프고, 아프면 또 일어나기 싫고, 넘어지면 주저앉아서 원망하는 마음이 커져버렸다.     

다시 다칠까 봐, 또 넘어질까 봐 조심하고 조바심 나고 그런다.     

하지만 어린 시절의 나는 그런 건 다 상관없었지.

넘어져도 다시 일어나고, 싸우다 질 것 같으면 우악스럽게 물어버리기도 하던 내가.

져도 우습게 지지 않겠다는 의지가 가득했던 내가.     

한 대를 맞으면 두 대를 때리려고 덤비는 내가 있었지.     

그걸 생각하니, 조금 힘이 난다.

그때의 나는 이제 컸지만, 그때의 내가 가졌던 마음을 기억하면서 살아야겠다.

넘어져도 일어나고, 아파도 다시 일어나고, 싸우다 질 것 같으면 물어버리기라도 하던 나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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