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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망 May 19. 2023

글로 남겨두고 싶은 12월의 어느 밤.

 할머니를 보내드렸다. 곧 돌아가실 것 같으니 빨리 오라는 연락을 받고 회사에 전하는데 그 말을 뱉음과 동시에 갑자기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당황했다. 아주 오래 편찮으셨고, 병원에 갈 때마다 더 나쁜 소식만 들려오던 터라서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는 하고 있었는데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태어나기도 전부터 정신이 온전하지 않은 채 고통받아 오셨어서 어쩌면 비로소 편해지실 수 있지 않을까 생각도 했었다. 그런데도 막상 그 일이 닥쳤다고 생각하니 덤덤해지지가 않았다.

명절 때조차 얼굴 보기 힘들었던 사촌까지, 온 친척이 보호자실에 차례차례 모였다. 누가 어디쯤 오고 있는지 묻는 말만 무미건조하게 오갔고, 이따금 장례 절차를 어떻게 할 건지 누군가 물었지만 아무도 속 시원하게 대답하지 않았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다. 나는 끔찍한 침묵 속에서 보호자실에 달린 커다란 TV에 나오는 중환자실 입원 목록과 벽면에 쓰인 성경구절을 미친 듯이 읽었다. 현진건의 '할머니의 죽음'이 계속해서 생각났고 왠지 오늘 돌아가시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다. 몇 명씩 짝지어 할머니의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고 밭은 숨을 내뱉는 할머니에게 그동안 너무너무 고생하셨다고 말씀드렸다. 할머니의 모습을 본 뒤로는 아빠에게 그래도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희망의 말은 더 이상 건넬 수가 없었다. 그래도 더 견디실 수 있지 않을까, 근데 그걸 과연 원하실까. 그런 생각만 하며 입원 목록에 새겨진 이름 세 글자만 바라봤다. 아주 먼 길을 올라와 뒤늦게 병원을 찾은 친척까지 마지막 인사를 마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어른들만 할머니의 정말 마지막 모습을 보러 가셨다. 나는 사망 선고 후에도 할머니의 성함이 여전히 목록에 있는 것을 봤다. 더는 병상 위에도, 이 세상에도 존재하지 않는데 이름만 남아 있었다. 그 이름은 환자가 아니라 고인이란 단어가 붙은 채 장례식장으로 이동했다. 그 단어와 단어 사이의 거리가, 이곳과 저 세상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 같아 문득 두려웠다.


할머니가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기 때문에 천주교식으로 할머니를 보내기로 했다. 할머니가 다니셨던 성당에서 십자가와 성경을 들고 왔다. 고모를 제외한 모두가 성당이나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나는 그 순간부터 어쩐지 모두의 마음이 한결 편해졌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계속 노래를 부르고 기도했다. 성당으로 가 미사에 참석하고 고해성사를 했다. 그때만큼 종교를 절실히 믿고 싶었고 가까웠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지만, 천국으로 가셨으니 너무 슬퍼함은 옳지 않다는 식의 신부님 말씀을 듣고 커다란 위안을 얻었다. 그러면서도 이게 남겨진 자들을 위한 위안, 그 이상의 의미가 없다면 어쩌지 하고 치솟는 의심을 누를 수밖에 없었다.


어른들은 아직도 우리를 어리게만 생각해서 입관 절차를 보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지만 나는 꼭 보고 싶었다. 그 모습을 보아야 할 것 같았다. 그렇게 다 같이 울고 서로를 다독이며 마지막을 함께했지만 그러지 않는 편이 좋았을까 싶을 정도로 잔상은 오래 남아 나를 괴롭혔다. 혼자 있거나 잠에 들기 전 불쑥 생의 유한함이 무서워져서 한동안 기댈 것을 찾았다. 고통스러웠던 청년 시절 글을 썼다는 아빠는 한동안 쓰지 않았던 글을 썼다. 일기와 편지의 중간쯤인 것 같은 그 글을 보면서 나도 울었다. 내겐 몇 번의 이별이 남아있을까. 그리고 나의 끝엔 어떤 사람이 있어줄까. 울지 않아도 되니 잠시 머무르고 기억해 주길 바라기도 했다. 그 고민의 시간 동안 남은 건 더 사랑을 전하고 더 적극적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이었다. 슬프게도 부재에 적응하고, 점차 회복되어 간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그렇게 흐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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