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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열무 Jan 25. 2024

나를 기분 좋게 만드는 것(들)

2018년. 두 번째  마음 쓰는 밤

첫 모임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부터 숙제는 시작 됐다. 좋아하는 것에 대해 가볍게 써보자는 작가님의 말씀이 왠지 나는 더 어렵고 무거웠다. 좋아하는 것, 좋아하는 것, 나를 기분 좋게 하는 것... 내내 머릿속에 띄워놓고 일상을 두리번거려도 도통 찾기가 어려웠다. 나도 분명 맛난 것을 먹으면 스트레스가 풀리고, 작고 귀여운 것들을 보면 탄성이 터지고, 특정 계절도 좋아하고, 내 취향인 것들은 많은데. 정말 나를 기분 좋아지게까지 할 만큼 내가 좋아하는 게 뭐가 있을까. 뭐 하나 꼬집어 내기가 도통 어려운 게 아니었다.

(그러던 중에 읽기 자료가 도착했다. 아, 삼일 남았다. 읽기 자료를 아무리 곱씹어 읽어도 딱히 뭐 하나 쥐어지는 문장 하나 단어 하나가 없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좋아하는 것에 대해 쓰는 것이 즐거우니 좋아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되도록 생각하지 않으려 한다지만. 나는 좋아하는 것에 대해 써본 적이 드물다. 나에게 글쓰기란 ‘일기’ 뿐이었고 대체로 하루의 고단함과 서러움 같은 것들을 죄다 쏟아 놓고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처박아버리는 감정 쓰레기통 정도였으니. 써본 적이 없다. 좋았던 것에 대한 일기를.)

아 그냥 일기 쓰기를 좋아한다고 할까? 솔직히 별로 좋아서 하는 일은 아닌데... 그러면 뭔가 꾸며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러기는 또 싫은데. 그냥 가지 말까? 근데 그건 또 아깝잖아.

1.

 오늘 아침. 그런 생각들을 꺼내면서 시작된 통화는 점점 사소한 대화로 이어갔고, 다음 주에 출국이라는 어떤 이의 여행 이야기까지 전해 듣게 되었다. 그때 별안간 내 입에서, “와 진짜 좋겠다! 그때가 제일 좋을 때잖아” 하면서 지난겨울의 기억과 어떤 설렘 같은 것들이 팍 터져 나왔다.

 그렇게 겨우 찾아온 나를 기분 좋게 하는 순간은, 굳이 말하자면 ‘소풍 가기 전 날’ 같은 것들이다. 어릴 때부터 그랬다. 나는 무언가를 손에 얻는 것보다 그것을 얻으러 가는 길을 더 좋았다. 그런 날이 다가오는 밤이 좋았다. 설레서 눈을 붙일 수가 없는, 챙기려 마음먹었던 것들을 빠짐없이 넣었지 확인하고 또 확인하던 소풍 가기 전날 밤을. 여행도 마찬가지였다. 지난겨울, 큰 마음은 먹었으나 별다른 계획 없이 먼 길을 여행하게 되었는데. 그전 날, 그 밤을 홀딱 새우고 공항버스를 타러 가기 직전까지 욕심껏 캐리어를 꾸렸다.

 막상 소풍날이 오면, 손꼽아 기다려왔던 이 날이 곧 끝나버릴 거라는 성급한 아쉬움으로 그 하루를 완벽히 즐기지 못하곤 한다. 여행도 마찬가지. 공항버스에 오르는 순간부터 설렘만큼 커다란 걱정들로 얼굴이 경직된다. 막상 여행지에서는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별하지 못하고 “꿈만 같다!”는 감탄사만 연발하며, 정말 꿈속을 거닐듯 현실감을 잃어 후에 그런 점들이 아쉽곤 하다.

 그런 긴장들까지 충분히 즐기지는 못하는 쫄보인 나는, 그래서 떠나기 전 날 밤이 가장 좋다.

2.

 나는 기록하는 걸 좋아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시간을 붙들어 둘 수 있는 방식들을 좋아한다. 거의 집착에 가깝다. 나는 기억력은 좋지 못하나 미련이 많다. 그래서 추억이 될 만한 것들은 버리지 못하고 죄다 끌어안고 살고, 기억에서 휘발되는 순간들이 아까워서 쉼 없이 기록한다.

 첫 번째로 사진. 가장 간단하고 쉽게 시간을 묶어 둘 수 있어서 좋다. 사실 그림이었으면 더 좋겠는데 나는 영 소질이 없다. 그래서 대신 찍어둔다. 사진에는 순간의 현상만 담기지만, 그것을 꺼내 보았을 때 생생하게 떠오르는 그날의 감촉들이 좋다.

 그리고 일기. 내가 첫사랑을 앓던 사춘기 소녀이던 때에는, 그를 만나고 돌아온 밤은 언제나 꼬박 새우곤 했다. 일기에 그 사람의 옷차림, 그가 했던 말 한마디, 그가 걷던 구둣발의 소리 같은 것까지 기억에 남은 것들은 깡그리 모아 기록했다. 그 안에는 식초를 끼얹은 단무지가 있고, 그가 마라톤 대회에서 가져다 둔 코인이 있고, 손 끝과 코 끝이 꽁꽁 언 호숫가의 벤치가 있고, 지켜지지 못한 수많은 약속들이 있다.. 첫사랑이 막 끝났을 무렵, 그 기록들은 한 자 한 자 아픈 것들이었지만. 시간이 많이 흐르고 꺼내보니 어린 날의 생생한 감정들을 되찾을 수 있어, 부지런히 기록한 과거의 내게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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