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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열음 Oct 17. 2022

많고 없어서 희미해지는


     오른손 중지의 세 번째 마디에 점이 생겼다.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몸 어딘가에 몇 개의 점이 생기고 사라졌을 텐데 나는 어느 날 갑자기 오른손 중지에 콕 박힌 듯 생겨난 그 점이 가장 좋았다. 반지를 좋아한다. 얇고, 큰 장식 없이 가벼운 반지가 좋다. 외출이 적어서 자주 끼지는 못했다. 손가락 타투를 생각하기도 했다. 아픈 게 무서워 엄두도 내지 못했다. 오른손 중지의 점은 반지와 타투를 대신해 나타난 것 같았다. 좋지도, 싫지도 않았던 내 손이 괜히 좋아졌다.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눈곱만한 점 때문에.

나는 오른손 중지의 점을 자주 들여다봤다. 괜히 쓸어보기도 했다. 그만큼 좋았다. 자주 들여다봐도 질리지 않을 만큼 나는 그 점을 깊이 좋아했다. 그러나 점은 내 마음과 반대로 점점 흐릿해졌다. 처음엔 진한 고동색 물감을 떨어뜨린 것처럼 진했던 점이 나중엔 자세히 들여다봐야 이곳에 점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챌 만큼 희미해졌다. 이러다 사라져버리는 게 아닐까, 덜컥 겁이 났을 때야 점은 희미해지는 것을 멈췄다. 이만큼만 남아있어도 충분하다는 듯. 그 후로 점을 자주 들여다보지 않았다. 가끔 그 점을 잊기도 했다. 그래야 할 것 같았다. 내가 바라던 점은 희미해지고, 내가 바라지 않던 점은 선명해지는 것 같아서 그랬다.



     누구는 내게 “넌 생각이 참 많은 것 같아.”라고 말했고, 또 다른 누구는 내게 “넌 생각이라는 게 없어?”라고 말했다. 누구에게도 긍정을 내비치지 못했다. 그런가? 라고 되묻거나 애매하게 웃었을 것이다. 왜냐면 나도 헷갈렸다. 나는 생각이 많은 것 같기도 했고, 생각이 아예 없는 것 같기도 했다. 늘 그 둘 사이를 오갔다. 어떤 때는 생각이 너무 많아 생각에 파묻혀 질식할 것 같았고, 어떤 때는 생각이 짧다 못해 없어서 한심해졌다. 그러다 전자와 후자가 말하는 “생각”이 무엇인지 생각해봤다.

생각. 전자와 후자가 말하는 생각은 분명 같은 옷을 입고 있지만 그 안은 다른 사람 같았다. 똑같은 체크 남방을 입고 있지만 전자는 A라는 사람이고, 후자는 B라는 사람인 것처럼 말이다. 내가 추측한 전자는 걱정 혹은 불안이었다. 그러니까 전자는 내게 이렇게 말한 것이다. “넌 걱정(혹은 불안)이 참 많은 것 같아.” 나는 곧바로 긍정했다. 나는 걱정과 불안이 많은 사람이다. 그들과 어깨동무하거나 가끔은 깊게 껴안기도 했다. 그렇다면 후자가 말한 생각은 무엇일까. 지식이나 지능이 아닐까. 일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두 번째, 혹은 세 번째 경우의 수를 생각하지 않고 처리해버리는 때에 주로 들었던 말이니 맞는 것 같았다. “넌 지식(혹은 지능)이라는 게 없어?” 조금 더 빨리 추측할 수 있었다면 후자의 누구에게 곧바로 사과했을 텐데. 미안합니다, 혹은 죄송합니다.

나는 내가 걱정(혹은 불안)은 적게 안고, 지식(혹은 지능)은 깊게 쌓길 바랐다. 하지만 내가 가졌으나 깊게 바란 점마저 희미해지는 마당에 내가 가져본 적 없는 점이 내게 선명하게 박힐 리 없었다. 나는 늘 생각이 너무 많거나 없어서 곤혹스러웠다.



     미안합니다. 이 글에는 “생각”이라는 단어가 너무 많이 나옵니다. 나는 조금 더 분명하게 생각하고 말할 필요가 있었다. 이런. 또 생각을 써버렸네.

그렇다면 이 글에는 “생각”이라는 말이 총 몇 번 나올까요?*



     나의 생각은 물을 좋아하는 것 같다. 몸에 물을 묻힐 때마다 어떤 생각이 떠올랐다. 이번에 말하는 생각은 걱정(혹은 불안), 지식(혹은 지능)이 아니라 아이디어: [명사] 어떤 일에 대한 구상. 생각은 몸에 물을 묻히는 면적이 넓을수록 잘 떠오르는 것 같았다. 매번 떠오르지는 않았지만, 이때 떠오른 생각은 대부분 좋은 소스가 됐다. 그리고 얼마 전 세수를 할 때 떠오른 것이다. “넌 생각이 참 많은 것 같아.” 이때의 생각은 걱정(혹은 불안)이고, “넌 생각이라는 게 없어?” 이때의 생각은 지식(혹은 지능)이라고. 그리고 나는 내가 바라는 점과 반대로 가는 것 같다고. 그래서 내가 바라는 점은 나와 점점 멀어져 희미해지는 것이라고. 사라지기 전에 그를 향해 가야할 것 같다고. 하지만 어떻게? 나의 걱정(혹은 불안)은 하루아침에 거리를 둘 수 있는 친구들이 아니었고, 지식(혹은 지능)은 하루아침에 친해질 수 있는 친구들이 아니었다. 그러다 문득, 전부 다 하루아침에 멀어지고 가까워지려는 심보가 문제는 아닐까. 답지 않게 현명한 생각이 떠올랐다. 천천히 멀어지고, 조금씩 가까워지는 것이다. 그러면 걱정이 적고 똑똑한 할머니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멋진 할머니가 될 수 있겠지 - 언젠가 이런 말을 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했던 일과 바라던 일, 기억하고 싶은 순간, 그 모두를 기록한 것 - 을 자주 잊는다. 쉽게 잊는다. 잊지 않기 위해 쓰고 있지만 이번에도 쉽게 잊을 것이다. 어쩌면 점은 희미해졌던 게 아니라 내가 점을 잊었던 걸지도 모른다.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희망을 드문드문 떠올리면서 사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결국 드문드문 떠올리겠지. 자주 잊는 만큼 자주 쓰고 다시 깨달으면서 나는 잊었던 점을 기억하고, 희미해진 점에 슬퍼하면서, 처음 접한 이야기처럼 반갑게 떠올리게 될 것이다. 그렇게 희미하지만 많은 점을 껴안고 사는 할머니가 되는 것이다. 그건 좀 괜찮을 것 같다.





*저도 세어보지 않아서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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