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3학년 때 집 앞의 단과 학원에 다녔다. 그곳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은,
“열음이 또 딴 세상 가 있지. 얼른 돌아와.”
였다. 그러면 나는 뒤늦게 내게 주의를 준 선생님을 보고 샤프를 고쳐 잡았다. 현실로 돌아와 책 속의 문제를 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던 것 같다.
나는 멍을 잘 때리는 아이였다. 수업을 듣다가도 허공을 보면서 교실이 아닌 곳을 배회했다. 지금 돌아보면 정말로 머릿속을 깨끗하게 비우고 아득히 먼 어딘가로 갔던 것 같다. 공기가 맑고 높은 곳에서 수평선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지금은 멍을 때리지 않는다. 허공을 보고 있으면 금세 시끄러운 생각들이 몰려와 시야에 엉켰다. 잡생각은 걱정이나 불안이 됐고, 아주 가끔 글의 소재가 됐다.
바다에 가야겠다. 늦잠으로 밀린 일을 깨작거리다가 생각했다. 느닷없이 바다가 너무 보고 싶었다. 모래사장에 앉아 바다 냄새를 맡고 바다를 보면서 글을 쓰면 좋을 것 같았다. 망가진 수면 패턴과 아무것도 하기 싫은 마음도 추스를 겸. 곧바로 날을 잡았다. 바다에 가기 전날에 다이소에 가서 돗자리도 샀다. 소풍 가기 전날에 들뜨는 것처럼 마음이 몽글몽글 피어났다. 가서 글도 쓰고 책도 읽어야지. 야무진 꿈을 꾸며 눈을 감았다.
늦잠을 잤다. 원래는 걸어서 갈 생각이었지만, 근처에서 아점을 간단하게 때우고 곧장 버스에 올랐다. 하늘엔 구름이 그득했다. 날이 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욕심껏 챙긴 가방은 무거웠고, 전날 밤에 먹은 매운 치킨 때문에 배가 아팠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나의 존엄을 지키기 위해 화장실부터 찾았다. 4,500원으로 존엄을 지킨 후 해변으로 다가갔다. 늦잠을 자각했을 때부터 하루가 전부 엉킨 것 같았는데, 바다는 흐린 하늘 아래에서도 근사했다. 콧속으로 바다 특유의 짠내가 밀려 들어왔다. 불만으로 우글대던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해가 나지 않아도 그 나름대로 운치가 있네. 근사한 풍경을 눈으로 담다가 근처 편의점으로 가 맥주를 한 캔 샀다. 술은 낮술이지. 맥주 한 캔 만큼 무거워진 가방을 메고 해변으로 내려갔다.
적당한 자리를 찾아 돗자리를 펼쳤다. 집에서 챙겨온 생수병으로 돗자리의 귀퉁이를 누르고 신발을 벗어 반대편 귀퉁이도 눌렀다. 모래의 차가운 기운이 느껴졌다. 그마저 좋아 흐흐 웃으면서 양반다리를 하고 앉았다.
눈앞에 바다가 있었다. 파도가 흰 포말을 일으키며 다가와 시원하게 부서졌다. 한참 바라보다가 가방을 열어 노트를 꺼냈다. 글을 쓸 목적으로 바다에 나온 것이었다. 목적도 잊은 채 바다만 보고 있을 뻔했다. 조금 전까지 있었던 일을 썼다. 한 문단 정도 쓰고 나니 말이 떨어졌다. 펜을 쥔 채 한 뼘가량 비어있는 노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파도가 치고 있었다. 가만히 파도를 바라보는데 할머니 두 분이 맨발로 느긋하게 걸어가셨다. 발 위로 파도가 살랑살랑 닿아오고 있었다. 수건을 가져올 걸 그랬나 생각하면서 주변으로 고개를 돌렸다. 흐리고 바람이 많이 부는데도 사람이 많았다. 맨발로 해변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달리는 사람, 파도를 등지고 사진을 찍는 사람, 아무것도 깔지 않고 바다 앞에 앉아 파도를 감상하는 사람, 자그마한 강아지와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모래사장을 걷는 사람. 한참 사람을 구경하다가 고개를 내리고 다시 노트를 채웠다. 대부분 이어지지 않는 생각 조각이었다.
노트를 반쯤 채웠을 때 맥주 캔을 땄다. 치익, 탁! 경쾌한 소리와 함께 아직도 차가운 맥주를 벌컥벌컥 마셨다. 동네 편의점을 모두 뒤져도 만나지 못했던 맥주라 기대가 컸다. 몇 모금 마시고 맥주 캔을 모래에 꽂았다. 복숭아 맛이라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오렌지 주스 맛이 났다. 신기한 맛이라고 감탄하면서 다시 노트를 채웠다.
겨우 한 페이지를 채우고 나니 무언가를 더 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그냥 파도를 보기로 했다. 페이지를 채우는 와중에도 몇 번이고 시선을 뺏겼던 파도를 마음 놓고 바라보고 싶었다. 파도를 보고 있으면 자연스럽게 멍해졌다. 머릿속이 아주 깨끗하게 비워지는 건 아니었지만 평소보다는 덜한 것 같았다. 쉼 없이 밀려와 부서지는 파도에 집중하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자각하고 나니 생각이 잠시 밀려들지 않는 순간이 낯설었다. 그게, 좋았다. 그 낯선 순간이 참 좋았다. 그래서 손을 주머니 속에 넣고 몸을 최대한 웅크리면서도 파도를 바라봤다. 이러려고 바다에 오고 싶었던 것 같았다.
추위에 백기를 들고 돗자리를 접을 때까지 한없이 바다를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