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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열음 Dec 03. 2022

게으름:이래도 되나


     나는 게으르다. 귀찮은 일은  질색이다. 정의하고 보니 귀찮은 - 기준을 어떻게 잡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따뜻한 자리에 누워 최근에 미룬 일을 생각했다. 지금 당장 전기장판을 끄고 일어나는 것부터 얼마  A/S 접수증을 출력하는 일까지  가지가 촤르륵 떠올랐다. …너무 많은  아냐?  밑으로 위기감이 치고 올라왔다. 하지만 전기장판을 끈다거나 일어나서 앉지 않았다. 누운 채로 다시 생각했다. 인쇄는 진짜 귀찮지. 오죽했으면 며칠을 미뤘을까. 수긍하다가 멈칫했다. 턱밑에 똬리를 틀고 앉은 위기감이 물었다. 고작 종이   뽑는 일이 뭐가 그렇게 귀찮아? 나도 마침 그렇게 생각한 참이었기 때문에 평소 같았다면 무시하고 넘어갔을 생각을   이어보기로 했다.


     내가 쓴 글을 출력해서 확인하기 위해서 프린터기를 샀다. 2018년 무렵에 샀는데 몇 번 쓰지 않아 아직도 새것 같다. 구입할 당시에 프린터기를 계속 켜두는 게 프린터기에 좋다고 들었는데…자주 쓰지 않는 기계를 계속 켜두는 게 내키지 않아 쓸 때만 전원을 켜고 있다. 자주 쓰지 않아 새것 같은 프린터기가 잡동사니 받침대가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프린터기 위에는 책상에 두기에는 부피가 크고 가벼운 물건이 올라갔다. 별 게 들어있지 않은 쇼핑백, 여분의 티슈, 먼지 제거용 돌돌이, 그리고 28색 크레파스. (전에는 더 많았는데 최대한 줄여서 이 넷만 남게 됐다. 최후의 4물.) 이 잡동사니들은 출력물이 나오는 곳 바로 위에 자리를 잡고 있다. 그러니까 인쇄할 때마다 이 잡동사니들을 치워야 한다는 얘기다. 물론 이건 내가 스스로 불러온 잡일이다…


     인쇄의 과정은 이렇다.

인쇄할 게 생긴다. 멀티탭을 끌고 와 책상 밑으로 기어들어가서 프린터기의 코드를 꽂는다. 어윽, 앓는 소리를 내며 일어나 프린터기 위에 쌓아둔 잡동사니를 치우고 프린터기의 전원을 켠다. 컴퓨터를 켜서 출력할 문서를 열고 인쇄한다.

인쇄할 일이 생기면 머릿속에 이 과정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눈을 질끈 감으면서 속으로 귀찮아! 라고 외친다. 과정을 떠올릴 때보다 속으로 귀찮다고 외칠 때, 인쇄는 더욱 분명하게 귀찮아진다. 당장 내일 필요한 서류라면 귀찮다고 하면서도 바로 인쇄의 과정에 돌입하겠지만. 기한이 있는 일이라면…미루기에 최적화된 과제가 된다. 아, 뭐야. 일주일 후면 당장 안 뽑아도 되네 - 하고 1차로 미룬다. 1차는 2차가 되고, 2차는 3차가 되고 3차는…그런 식으로 미룰 수 있을 때까지 미룬다. 그사이 나는 몇 번이고 인쇄할 게 있다는 사실을 상기한다. 그러다 더는 미룰 수 없을 때가 오면 손발을 축 늘어뜨리고 모든 의지를 빼앗긴 인간처럼 방으로 들어가 멀티탭을 질질 끌고 온다. 처음에 느꼈던 귀찮음보다 배는 큰 귀찮음에 짓눌린 채 인쇄의 과정에 들어간다.



     프린터기가 종이를 뱉어내는 걸 보고 있으면, 이거 진짜 별거 아닌데. 왜 미뤘을까. 빨리 해치워 버리는 편이 훨씬 좋았을 텐데 - 같은 생각을 한다. 하지만 인쇄가 끝난 종이를 꺼내 확인하는 나는 안다. 나는 다음에도 인쇄를 최대한, 최-대한 미루리라는 것을.


근데 정말 왜 그러는 걸까. 나는 왜 별것 아닌 일을 귀찮아 카테고리에 집어넣는 걸까. 일을 머릿속으로 미리 굴려보는 동안 나는 이미 벌써 그 일을 한 번 해본 상태가 된다. 근데 상상과 현실은 달라서 대부분의 일은 머릿속에서 굴렸을 때보다 훨씬 쉽게 해결된다. 완벽하게 해내고 싶은 마음에 어떤 일을 미루는 게 게으른 완벽주의라면, 자잘한 일도 귀찮다고 결정짓고 미뤄버리는 이유는 뭘까. 게으름일까. 그럼 내가 바란 적 없는 이 게으름은 대체 어디에서 온 걸까.


뭐가 됐든, 더는, 뭐든, 미루고 싶지 않다.

머릿속에서 일을 한번 굴려보는 버릇부터 처리해야 할 것 같다. 그냥 한다 - 는 말을 다시 한 번 생각해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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