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10938 현장 복귀

by 염군


"안녕하세요. 오늘 00 신규 입사잔데요."

"네 잠시만요."


엑셀 시트에 내 이름을 검색하는 프론트 데스크 직원. 검색하자마자 뜬 'E2363' 그리고 'E10938'. 이전에 등록되어 있던 내 이름을 보고 비로소 나는 다시 이 곳에 복귀했음을 실감했다.




2017년 상반기. 그 당시 나는 패션계에서 일하겠다는 부푼 꿈을 안고 취업을 준비했었다. 부모님에게 독립하자마자 당장 돈을 벌어야 했고 그 와중에 취직 면접을 볼 수 있도록 이 곳의 야간 사무보조 파견직을 지원했고 약 3개월간 일을 했었더랬다.

그때 그 당시, 나의 목표는 오롯이 '패션'이었고 많은 동료들의 정규직 전환을 눈 앞에 보면서도 '난 패션일 할 거니까.'라는 생각에 제법 알려진 업계에 들어가기 위해 발버둥 쳤다. 그리고 나름 들으면 알만한 패션 이커머스 마케터로 취직하며 이 곳과의 인연은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성공했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그리고 지금, 3년 만에 난 이 회사를 다시 재입사했다. 프런트에 서서 사원증을 받는 순간 알았다. 지금의 나는 정규직이 아닌 계약직이라는 사실이, 그리고 패션 마케팅이 아닌 다른 일을 한다는 것이 그다지 큰 결격사유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3년 여동안 패션업계에서 수많은 일들을 겪으면서 느낀 게 있다면 "내일 잘릴 수도 있다."라는 미래에 대한 불안감보다 이게 맞지 않는 걸 알면서도 맞는 것이라고 스스로 체념하며 다니는 일종의 "불안감"이 더 나를 힘들게 한다는 것이었다. 일 강도 대비 월급의 불공평성, 망가진 워라벨, 매일 사로잡히는 불투명한 걱정들은 미래를 준비하기에 앞서 나 자신을 아프게 하는 짓이었다는 걸,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회사에서 책임져주지 않는다는 걸 깨달은 후부터 이젠 뭐든 좋으니 나 자신을 지킬 수 있는 회사를 다니고 싶은 마음이 더 커지게 되었다.


'다시 시작이구나.'


속으로 되뇌며 사무실에 발을 내딛고 본격적인 입사 교육을 듣기 시작했다.



OJT는 생각 외로 길었다. 하지만 커머스 마케터를 하며 그동안 해왔던 업무 경력들과 비슷한 업무들이 눈에 보였고 업계에 대한 이해도가 있다 보니 대략적인 가이드라인이 눈에 들어왔다.

"하긴 대리였는데..."


DA / SA를 컨트롤하던 광고주에서 이제는 키워드 별로 광고 검수를 하는 입장에 선 나 자신이 그다지 유쾌하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 전과 나를 비교하면 한도 끝도 없겠다는 생각으로 다시 키보드를 붙잡고 마음을 다잡기 시작한다. '나는 다시 출발선에 선 것이다. 나는 다시 시작한다.'라는 주문을 계속 머릿속에 입력 또 입력하지만 한꺼번에 추락 아닌 추락한 내 위치가 썩 좋지만은 않았다. 정규직 전환이 되려면 11개월의 기간을 버텨야 하는데 그게 가능할지도, 그리고 그 시간 동안 내 미래는 어떻게 될지 정말 감이 오질 않았다.

하지만, 그것 하나는 어쩌면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동안 나는 회사의 일과 나 자신의 생활을 분리하지 못하는 일종의 '병'을 가지고 있었다. 그 병은 알게 모르게 내 삶을 갉아먹고 있었던 것 같다. 그것은 다분히 내가 하는 일에 대한 열정이 커서 일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르게 생각하면 내 삶과 일을 컨트롤하지 못한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회사를 박차고 나가는 순간부터 걱정 스위치를 OFF 하는 것. 어쩌면 지금 이 곳에서 내가 다음 회사를 갈 때 배울 수 있는 가장 큰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만 배우더라도 어쩌면 20년의 커리어를 계속해서 유지할 수 있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계속해서 하게 되었다.




6시 30분 칼퇴를 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오랜만에 칼퇴라는 걸 해본다. 그 전 회사에서 마지막까지 야근 아닌 야근을 했던 나로서는 눈치 안 보고 칼퇴한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나름 오늘도 시끌벅적한 하루를 보냈지만 전혀 아무것도 생각이 들지 않는다. 다만 지금을 살아가는 연습을 하는 것, 그리고 앞으로 이런 일을 겪지 않도록 하는 연습을 앞으로 해야 한다는 다짐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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