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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명 Nov 29. 2020

완벽주의의 필연적 허상

결국 우리가 좇게 되는 모든 것은 그저 허상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만개한 꽃을 보고 아름답다고 말하는 이유는 그 꽃은 곧 지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영원함을 좇는 이유는 세상에 영원이란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세상에 없는 것을 좇는다.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갖고 싶어 한다. 영원이 이미 존재했다면 사람들은 더 이상 그것을 가치 있게 여기지 않을 것이다.


 내가 열일곱 살 때 국어 수행평가로 선생님이 지정해준 여러 시 중에서 두세 개를 골라 감상문을 적어 내야 하는 게 있었다. 나는 그중에서 하나는 김춘수의 꽃이라는 시를 골랐고 다른 하나는 아마도 꽃과 사랑에 대한 시, 나머지 하나는 기억이 거의 나질 않는다. (내가 김춘수의 꽃을 아직까지도 분명히 기억하는 것은 그때 내가 가장 좋아하는 시였기 때문이다.) 어쨌든 서문의 내용은 그때 내 감상문의 일부이다. 꽃과 사랑에 대한 시를 읽고 쓴 감상문이었다. 수행평가니까 그냥 써서 냈는데, 채점 후 받은 글에는 저 부분만 빨간색 사인펜으로 밑줄이 그어져 있었다. 이게 무슨 의미일까 하고 다른 친구 것을 슬쩍 봤는데 친구의 글에는 빨간 밑줄이 없었다.


 그래서 그런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 국어 선생님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는다. 짙은 검은색 머리칼에 단발머리. 그 선생님은 눈이 정말 크고 동그랬다. 피부는 까무잡잡하고 눈썹은 짙고 화장은 많이 안 하는 편이셨는데 늘 입술 색만큼은 붉었다. 키는 작았지만 목소리는 크고 또랑또랑 카랑카랑했다. 명석하고 패기 있고 호탕한, 젊은 선생님이셨는데 간혹 그 선생님을 싫어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나는 그런 선생님이 싫지 않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에는 자연스레 선생님을 잊고 살았다. 그러다 한 번은 내가 아르바이트하는 서점에서 그 선생님을 다시 마주쳤다. (물론 선생님은 나를 못 보고 나만 선생님을 보았다.) 그런데 오랜만에 본 선생님은 어딘가 달라 보였다. 늘 단발이었던 머리가 허리 끝까지 치렁치렁 자라 있었다. 단지 머리 길이가 바뀌어서 사람이 크게 달라 보였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뭔가 그랬다. 그냥 느낌이 이상했다. 그날은 평일이었고 선생님이 책을 사러 서점에 오기에는 힘든 시간대였다.


 얼마 뒤, 나는 친한 동창들과 만난 술자리에서 우연히 그 선생님의 소식을 들었다. 너 그 선생님 기억나? 우리 1학년 때 국어 가르쳤던 선생님 있잖아. 국어 선생님. 그 선생님이 병에 걸렸대. 그래서 학교도 그만둔 지 꽤 됐다는데? 헐 진짜? 그 선생님이? 어, 그래서 병원에 있대. 나는 놀람과 동시에 그때 내가 느꼈던 이질감의 이유를 바로 납득했다. 백혈병이었는지 암이었는지. 아무튼 선생님이 앓고 계신 병은 큰 병이셨다. 그 선생님이 그런 큰 병에 걸리는 것은 모두가 상상도 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다들 잠시 잠깐 안타까워했지만 그뿐이었다. 우리는 그러고 다시 다른

얘기로 떠들었다. 그 뒤로는 들은 바가 없어 선생님이 어떻게 되셨는지는 모른다.


 산다는 것은 뭘까. 돌고 돌아 만나고 헤어지고 울고 웃고 원망하며 사랑하고 또 죽고 살고. 인생을 산다는 것은 결국 허상만을 좇는 여정인 걸까. 허무하다는 것은 아니지만 요즘 나는 영원뿐만 아니라 내가 실재한다고 생각한 모든 것들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아가는 중이다. ‘완벽’이란 허상이라는 것을 불과 얼마 전에 알았는데, 지금은 ‘성공’ 또한 허상이 아닐까 곰곰이 생각해 보는 것이다.


 ‘성공’이란 무엇일까. 그리고 ‘실패’란 무엇일까. 나는 타인에게는 계속 자신의 다양한 면을 투영해 보면서 정작 스스로를 제대로 볼 줄은 모른다. 나를 들여다보려고 하니 내 안의 거울은 깨져있다. 깨진 거울에 멀거니 전신을 비춰보며 계속 생각하고 또 생각한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어떤 사람인가. 내가 생각하는 ‘완벽’은 뭐고 ‘성공’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왜 그것들에 집착할까. 그런데 집착하면 또 어떤가. 앞으로 나는 내 앞의 모든 일을 어떻게 봐야 할까. 어떻게 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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