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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명 Nov 29. 2020

배려와 양보라는 양날의 검

 나는 나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남들에 비하면 나만의 시간을 충분히 가졌고 자기 계발, 심리나 철학에 관한 서적을 꽤 여러 권 읽었기 때문이다. 심리상담도 꾸준히 받아보았고 그 과정에서 얻은 것들이 많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스스로가 많이 변화하기도 했고. 그런데 최근 여러 일들을 겪고 나서 많이 힘들었다. 나도 모르는 새 습관처럼 전과 같은 행동을 반복하고 있었다.


 과거의 나는 우유부단하고 자존감이 낮았다. 친구와 식당에 가면 메뉴를 고를 때 항상 친구에게 우선권을 주었다. 친구가 고른 메뉴가 내심 바라던 메뉴와 같다면 더없이 좋은 일이지만 내가 그다지 먹고 싶지 않은 메뉴를 고르게 되면 싫었다. 그렇지만 내색하진 못했다. 친구가 그게 먹고 싶다고 하니까. 나는 ‘그럼 그걸로 하자.’ 말하고 메뉴판을 덮었다.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속으로 되뇌었다. 배려라는 이름으로 양보하고 자신은 돌보지 않는 일이 일상이었다. 아빠는 고집이 세다. 자기주장이 강하다. 엄마도 그에 뒤지지 않는다. 나도 한 고집한다. 그

거니까 그 시절에도 내가 자아 없이 마냥 우유부단하기만 했던 것은 아니었다. 나는 한번 고집을 부리면 꺾기 힘든 사람이지만 친구들과의 사이에서 그런 일은 드물었다. 그때의 나는 딸기 하나가 가운데에 장식된 생크림 케이크 같았다. 다른 건 다 가져가도 되지만 딸기 하나만 은 절대 안 돼. 딸기 하나 빼고 다 주었다.


 특별 활동으로 무엇을 할지 정하는 시간이었다. 고등학교 때 다들 한 명씩은 ‘베스트 프렌드’라고 부르는 친구가 한 명씩은 있었을 것이다. 나도 그런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농구부에 들어가고 싶어 했다. 그리고 나보고 같이 들어가자고 했다.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다른 활동이 하고 싶었다. 내게 남자애들이 득실득실한 농구부는 달갑지 않았고 더군다나 그 사이에 껴서 땡볕에 땀 뻘뻘 흘리며 경기하기는 더더욱 싫었다. 하지만 그 친구는 계속해서 나를 설득했다. 농구하기 싫다고 하니 농구부에 들어도 어차피 우리는 별로 할 일이 없다고 했다. 그럼 왜 농구부를 들어가야 하지? 하고 생각했지만 동시에 그 말에 혹해서 나는 하고 싶던 동아리 명단에 써놓은 내 이름을 지우고 농구부 명단에 내 이름을 옮겨 적었다. 그렇게 한 학기 동안 농구부 활동을 했다. 농구부는 생각보다 괜찮았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그때, 농구부 명단에 내 이름을 옮기기 전 처음에 이름을 적었었던 동아리가 뭐였는지 지금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청소년 때 나는 조금씩 나를 잃어갔다. 어쩌면 처음부터 이미 잃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누군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어떤 기분인지, 어떤 상태인지도 전혀 알지 못했다. 배려와 양보라는 양날의 검이 내 쪽으로만 기울어져 있었다. 미움받고 싶지 않은 마음과 남을 위하는 마음이 앞서 그것은 분명히 양날의 검인데도 불구하고 나만 깊이 베여 피를 철철 흘렸다. 상대방은 베여본 적 없으니 그게 칼인지도 모른다. 과거의 나는 아픈 줄 모르고 항상 웃었다. 사람들은 내가 웃는 게 예쁘다고 했다. 그럴수록 칼날은 더 깊이 박혀갔다.


 검을 뽑았다고 생각했다. 많은 일을 겪으면서 나는 거절하는 법을 배웠다. 과거의 나는 거절하는 법을 몰랐다. 이제는 길을 지나가다 이상한 사람이 말을 걸면 대꾸조차 안 하고 지나간다. 어떤 부탁을 받아도 하고 싶지 않으면 거절한다. 메뉴를 고를 땐 먹고 싶은 음식을 분명히 말한다. 사람들에게 내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다. 하지만 지금 또 이렇게 힘든 걸 보면 난 그것으로는 부족했나 보다.


나부터 행복해야 다른 사람도 챙기는 거야

그러니까 힘들면 자신부터 챙겨 알았지?

그게 모두가 행복해지는 방법이야.


 휴대폰을 뒤적거리는데 두 달 전 내가 적어놓은 글을 우연히 발견했다. 그조차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하는 말이었다. 내가 이런 말도 했었구나. 기억도 못하고 있었는데. 다정도 참 병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는 내가 듣고 싶었던 말을 타인에게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아니 그랬을 것이다. 내가 간절하게 필요로 했지만 곁에 없었던 그런 사람이 되어주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들은 내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제대로 실천할 수 있다. 머리로는 알면서 몸은 여전히 일한다. 배려와 양보의 중용은 어디일까. 뭐든 적당히 하는 게 제일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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