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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명 Nov 29. 2020

발등에 모르는 멍이 생겼다

하루를 끝 마치는 시간, 샤워를 하면서

 잠자리에 들기 전 온몸에 덕지덕지 묻은 생각들을 씻어 내리는 시간은 내게 무척 소중하다. 예전에는 노래를 틀어 놓기도 하고 영상을 보기도 했지만 최근엔 그냥 샤워라는 행위에만 집중한다. 다른 생각 않고 오로지 샤워에만 집중하는 것만큼 휴식이 되는 일은 일상에서 좀처럼 찾기 힘들다. 나는 머리 위 고정된 샤워기에서 차갑고 마른 타일 바닥으로 떨어지는 물소리를 들으며 따뜻한 물에 몸을 데웠다.


 나는 샤워할 때면 항상 양치부터 한다. 양치를 끝마치면 샤워볼에 거품을 한껏 내어 온 몸을 깨끗이 닦는다. 몸을 숙여 다리를 샤워볼로 문지르는데 발등이 눈에 들어온다. 발등에 모르는 멍이 생겼다. 색이 푸르고 검은 게 누르면 꽤나 아플 것 같다. 도대체 언제 어떻게 생긴 건지 전혀 짐작이 되지 않는다. 기억을 꺼내 더듬어 봐도 생각나는 일이 없다. 괜한 호기심에 손끝으로 꾹꾹 눌러보면 그리 아프지 않다. 별 거 아니네.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상체를 들어 올려 다시 똑바로 선다. 마저 씻기 시작했다.


 샤워를 마치고 욕실 문 앞의 매트에 서서 수건으로 물기를 닦았다. 그러면서 발등의 멍이 다시 한번 눈에 들어온다. 꾹 눌러봐도 여전히 아프지 않았다. 옷을 꿰어 입고 침대에 앉아 휴대폰을 들여다보는데 문득 살다 보면 이런 일이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휴대폰을 켜 떠오른 생각을 적었다. 살다 보면, 나도 모르는 멍이 자꾸 생긴다. 그리고 없어진다. 때로는 그냥 남는다.


 산다는 게 참 그렇다. 지레 겁을 먹고 시작한 일은 생각보다 잘 풀리고 별생각 없이 벌인 일은 나를 힘들게 한다. 나는 괜찮을 줄 알았는데 괜찮지 않거나 괜찮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괜찮을 때가 있다. 계속 아플 줄 알았던 멍이 금방 빠지기도 하고 금방 없어질 줄 알았던 멍이 계속 아프기도 하다. 내게 산다는 건, 이렇게나 복잡하고 뜻대로 안 되는 일이다.


 삶은 멍과 같다. 우연히 발등의 멍을 발견하고 샤워를 끝마친 후 들었던 생각이다. 겉으로 피가 철철 나지는 않지만 안쪽에서는 조용한 출혈이 일어난다. 삶의 멍이 짙으면 얼굴에 드러날 것이고 옅으면 잘 드러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색이 짙고 옅음이 무조건 고통의 정도를 그대로 드러내 주는 것은 아니다. 나처럼 본인이 언제 어디서 멍이 들었는지도 모르는 사람이 허다할 것이다. 그렇게 모르고 살다가 가끔 멍든 곳이 눌리면 그때 아파하겠지. 눌려도 아픈 줄 모르다 뒤늦게 멍을 발견하고는 상념에 빠질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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