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예민함이 독이 될 때
일상은 충분히 평화롭게 흘러가고 있다. 시간적 여유도 넉넉하고 특별히 부족한 것도 없다 생각했다. 정해진 루틴대로 하루를 착실하게 잘 쌓아가고 있어 건강하게 삶을 잘 이어가고 있다 생각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던 것 같다. 실은 계속 지쳐가는 중인데 내가 그걸 놓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몸과 마음이 지쳐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감정이 지쳐가는 것 같았다. 정리되지 못 한, 아물지 못 한 감정이 말이다. 큰 이별이 있었고, 그 이별을 통해 나라는 사람을 다시 생각했다. 나는 어떤 사람이고, 어떤 사람을 만나야 괜찮을지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다듬는 과정이 부족했던 것 같다. 감정을 인정해 줄 시간, 충분히 아파할 시간을 내게 주지 못 했다. 감정이 남았다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나라는 사람의 마음을 돌아볼 여유가 부족했다 말하는 것이다. 요즘 계속 뭔가 닳고 있다 생각했는데, 근본적인 문제가 여기 있었다. 실은 나는 누군가와 지속적으로 만남을 이어가는 과정 자체를 지쳐하는 사람인지도 모르겠다. 특히 말! 말 한마디에 천 냥 빚도 갚는다는 말을 신봉하는 나에게 타인들이 무심코 내뱉는 말들이 얼마나 큰 타격을 주는지 점점 더 깨달아 가는 중이다. 특히 관계가 가까울수록 말로 받은 상처는 꽤 오랫동안 내 마음에 생채기를 남긴다.
<오은영의 금쪽상담소>를 가끔 챙겨 본다. 그중에 신소율 배우편을 보면서 나와 닮은 점이 정말 많다고 느꼈다. 그녀는 오랫동안 관계를 유지해온 친구가 없다고 말했다. 성장하며 달라진 가치관 때문에 싸우고 싶지 않아서 멀리하다 보니 자연스레 그 관계가 소멸되었다는 것이다. 그녀는 특히 타인의 언행에 지나치게 상처를 받는 사람이었다. 바로 나처럼 말이다. 이에 오은영 박사는 그녀를 습자지 같은 사람이라 말한다. 상대가 주는 자극이 화선지에 물이 스며들듯 순식간에 흡수되어 버리는 것이다. 이어서 습자지 같은 마음은 자신만의 기준으로 외부 자극을 걸러낼 기준이 없어 감정이 불안한 상태라고 설명했다.
아마 나도 그랬던 것 같다. 말이라는 게 사실 매 순간 신경 쓰면서 하는 것이 아니고, 누군가는 그저 가볍게 뱉은 농담일 뿐인데 나는 그 말 한마디 한마디에 지나치게 의미를 부여하고, 내가 뱉은 모든 말에도 늘 책임감을 느껴왔던 것이다. 일례로 나는 '밥 한 번 먹자'는 말에도 책임감을 느낀다. 누군가는 인사처럼 하는 그 말을 나는 꼭 밥을 먹을 게 아니라면 절대 답하지 않는다. 대신 대답했다면 반드시 약속을 잡고 먹는다. 모든 말에 이렇게 힘을 주다 보니 그 과정에서 내 감정은 계속 다쳐갔다. 특히 가까운 누군가와 관계를 지속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힘들었고, 그 관계가 익숙해져(편해져) 상대의 말이 가벼워지기 시작하면 그런 상대의 모습을 보기 두려워 밀어내는 시간이 필요했다. 거리두기의 필요성을 느끼며 혼자만의 시간을 가졌다. 상대는 영문도 모른 채 나의 시간을 존중하면서도 서운해했고 그 감정이 쌓이면서 폭발적으로 터져 나올 때 나는 '역시 다 똑같아'를 외치며 나의 시간을 존중하지 못하는 상대를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게 서로를 이해하지 못한 채 자연스레 멀어져 버린 관계들이 차곡차곡 쌓이면서 나라는 사람은 대체 왜 이 모양인가 자책하는 시간도 많아졌다. 나는 상대를 외롭고 힘들게 만드는 사람인가 궁극적인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는 나의 예민함이 있었다. 예민한 사람들이 말에 얼마나 큰 의미를 담는지 그 흔한 기질들이 자연스레 떠오른 것이다.
내가 브런치에서 가장 처음으로 구독하기 시작했던 작가님이 있는데, 유랑선생이라는 필명을 가진 작가님이다. 예민함을 주제로 한 글을 찾다가 우연히 알게 되어 지금도 꾸준히 구독 중인데, 작가님의 기질적인 예민함이 나와 정말 닮아있어 그분의 글을 읽을 때마다 공감하며 위로받을 때가 많았다. 작가님은 자신의 저서인 <어느 날 유리멘탈 개복치로 판정받았다>에서 타인의 반응에 쉽게 상처받거나 마음이 요동치지 않는 나를 만들어가는 것이 하나의 목표라 말씀하시는데, 나 또한 이와 같은 마음일 때가 많았다.
친한 이의 무례한 발언에도, 그걸 지적하면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만들까 봐 반박하지 못하고 꾹 참는 순간도 있었다. 무례한 발언을 듣거나 재미없는 대화를 하느니 차라리 혼자 있는 것이 낫겠다는 생각도 자주 했고, 실제로 혼자 있는 시간을 반드시 만들며 지냈다.
(중략)
나와 비슷한 유리멘탈 개복치나 예민보스들이 인간관계에서 삼는 최대의 목표는 피곤함이 덜하고, 덜 지치며, 회의감이 적은 관계를 맺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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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예민함이 넘쳐흐를 때 나는 고약한 사람이 된다. 그 고약한 모습에 다치는 상대를 보고 있으면 나라는 인간의 부족함을 온몸으로 느끼며 이 관계의 종결을 진지하게 고민한다. 대체로 모든 이에게 무해한 사람이고 싶은데, 나로 인해 누군가가 다치는 상황은 내가 가장 원하지 않는 것이기에. 그렇게 나는 자연스레 혼자 있는 시간으로 상대와의 거리를 만들고, 그런 내 모습에 상대는 서운해하면서 관계에 균열이 시작된다. 나의 예민함을 보고 자신은 그것을 감당할 자신이 없다 말하는 상대도 있었다. 그 말을 듣고 집으로 향하는 길은 지독히도 외로워 혼자 엉엉 울며 발걸음을 옮겼다. 골방에 틀어박혀 한동안 누구도 만나지 못한 채로 말이다. 최근에도 그런 내 모습에 다치는 이가 생겼다. 나는 그 모습에 놀라 거리두기를 시작해야 할 시점이 왔다고 생각하며 상대에게 혼자만의 시간을 말했다. 그리고 용기를 내어 너의 잘못이 아니라 나의 예민함 때문이라고 미안하다 말했다. 그런 내 모습에 상대는 자신 없다 말하지 않았다. 그런 것 때문이라면 자신이 좀 다치면 된다고, 다치면서 나한테 맞춰가면 되는 것 아니냐고 되려 걱정하지 말고 푹 쉬고 오라고 말했다. 그렇게 나는 또 울었다. 나의 예민함이 독이 되는 순간들이 있는데, 바로 이렇게 가까운 이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균열이 그 시작이었다.
그리고 그 시기를 지나가는 중이다. 아직 잘 지나가고 있다 자신할 수 없지만, 적어도 나의 예민함으로 다치는 것이 괜찮다 말하는 이가 옆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건강해지고 있는 느낌이다. 나는 서로의 언어에 서로가 익숙해질 필요가 있음을, 그리고 나의 경우에 그 시간이 반드시 필요한 사람임을 다시 한번 느낀다. 다음 달에 나는 누군가의 인터뷰이가 된다. 나의 예민함을 이겨내기 위해 그리고 위로하기 위해 먼저 용기를 냈다. 대본을 쓰고 만반의 준비를 갖춘 나에게 그는 아무것도 준비하지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의 나를 표현하면 된다고 말했다. 나의 예민함을 억지로 누릴 필요도 없고, 조심할 필요도 없이 그저 나라는 사람을 마음껏 풀어놓으면 된다고 말이다. 인터뷰 과정에서 나의 예민함이라는 기질은 누군가에게 불편함을 주는 행위가 아닌 그저 나라는 사람의 일부라는 것을 온전히 느끼며 치유되길 진심으로 바란다는 그의 말에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게 바로 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