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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내민해 Oct 08. 2022

예의 바른 대나무 숲

우리 같이 만들어 볼래요?

내가 꿈꾸고 만들고 싶은 공간이 있는데 그건 다름 아닌 나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을 위한 진지한 고민 상담소다. 하지만 모두가 솔직하게 고민을 털어놓고 진심으로 들어주는 공간이 자칫 잘못하면 누구 한 명의 일방적인 감정 쓰레기통으로 전락할 수도 있기 때문에 가입 조건을 꽤 까다롭게 만들 것이다.

우선 대화의 온도가 비슷해야 하기 때문에 나와 닮은 내향인이자 개인주의자여야 한다. 타인의 취향을 존중하고 조심스럽게 말을 건넬 수 있는 섬세한 센서의 예민함도 있어야 한다. 일방적으로 자신의 이야기와 감정만을 쏟아내는 사람은 받을 수 없다. 상대의 고민도 함께 듣고 공감해 줄 수 있는 배려심 있고 균형감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그리고 입이 무거워 이 공간에서 나눈 이야기는 어느 누구에게도 쉽게 전하지 않는 사람이면 좋겠다.

반면에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나이 어린 누군가를 가르치려 들거나 함부로 판단하거나 타인의 인생에 지나치게 관여하는 사람은 철저하게 강퇴시킬 것이다. 타인의 아픔을 동정하며 자신이 상대적으로 괜찮은 사람이라고 안위하는 사람들도 배제할 것이다. 공허한 수다보다 본질적인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사람들만 받을 것이다. 웃기지도 않은 개그로 누군가의 마음에 생채기를 내는 이들도 거부한다.

쓰다 보니 과연 이 조건에 부합하는 사람이 있을까 생각이 많아진다. 나 역시 그런 사람이 아니기도 하지만 그런 사람이고 싶은 사람이기 때문에 모순적이다. 방장이 꼭 나일 필요는 없다. 나보다 더 현명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세상에 많으니까. 다만 적어도 쉽게 시작하고 싶지는 않다. 누군가의 진심을 진심으로 공감할 수 있는 사람, 누군가의 진지함을 우스꽝스럽다 비웃지 않고 차분하게 들여다보며 함께 울고 웃어줄 수 있는 이해심 있는 사람이면 좋겠다.

브런치에서도 여러 번 나눴지만 나는 예민한 사람이다. 이 예민함은 감각에 대한 예민함이지 매사에 트집을 잡는 신경질적인 예민함과는 결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내가 속해있는 예민한 사람들을 위한 카톡방도 마찬가지다. 처음 그곳에 입장할 때만 해도 예민한 사람들끼리는 각자의 예민함을 알기 때문에 서로 굉장히 존중하고 조심할 거라 생각했는데 꼭 그렇지만도 않았다. 그 방에 1년 넘게 소속되어 있으면서 느낀 것은 나와 성향이 비슷한 사람들 중에서도 또 종류가 나뉜다는 것이었다. 이 방에 들어왔다 나간 사람들 중 어떤 이는 막말을 했고, 어떤 이들은 "네가 더 예민해!"라고 서로를 비난하고 싸우기도 했으며 "정신 나간 것들"이라 말하며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남아있는 사람들을 들쑤시는 사람도 있었다. 아니 다 민감한 사람들이라면서 왜 이렇게 타인의 감정을 존중하지 못하는 건지 처음에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알 것도 같다.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사람들이 있고 아무리 비슷한 결을 갖췄다고 해서 모든 면에서 다 같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현요아 작가(보고 싶어요. 작가님)는 <세상에서 내가 제일 못나 보일 때>라는 제목의 글에서 자신이 만들고자 상상한 방을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오늘은 세상에서 내가 제일 못났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모인 커다란 방. 그 방은 노란 조명이 은은하게 켜져 있고, 마음을 홀릴 재즈가 잔잔하게 흐르며 엉덩이를 대면 더는 못 일어날 것 같은 푹신한 소파가 늘어져 있다. 마음대로 간식을 먹어도 되고 영화를 봐도 된다. 그러나 반드시 지켜야 할 한 가지 규칙이 있다. 한 손으로 다른 사람의 손을 따스히 잡을 것. 이어진 온기에 마음이 괜찮아지면 나중에 말없이 그 방을 나가도 된다. 괜찮아졌다가 어느 날 갑자기 다시 들어와도 누군가 이유를 묻지 않는 방이다.

내가 만들고 싶은 고민 상담소는 누군가의 감정 쓰레기통도 날카로운 토론의 장도 아니다. 그저 다친 사람들이 함께 모여 서로의 상처를 진심으로 위로하며 다정하게 연대하는 공동체이길 바란다. 그러기 위해서 우선 나부터가 문제를 개선하려는 의지를 가진 사람이길 바란다. 타인의 잘못을 탓하기 전에 나 자신은 어떠한가를 성찰할 수 있는 사람이었으면 한다는 뜻이다. 상담은 그다음부터 시작될 것이다. 문제는 그대로 두고 올라오는 스트레스를 누군가에게 하소연만 하고 싶은 것이라면 미안하지만 이 방이 아니다.

여담이지만 몇 달째 캘리그라피를 배우고 있다. 취미 클래스로 수강 중인데, 꾸준히 연습할 수 있는 모임도 만들면 좋을 것 같아 모집을 시작했고 오늘 첫 모임을 가졌다. 뭐 특별한 것은 없다. 나 자체가 여러사람들과 대면해서 친목을 도모하는 것 자체를 즐겨하지 않는 터라 말 그래도 캘리그라피에만 충실한 모임을 만들었다. 같은 시간에 카페에 모여 각자가 원하는 자리에 뿔뿔이 흩어져 앉아 연습만 한 뒤 인사하고 헤어지는 그야말로 내향적인 캘리그라피 모임이다. 정중하게 첫인사와 마지막 인사를 나누고 우리는 익명의 누군가로 그렇게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내가 만들고 싶은 진지한 고민 상담소도 이와 비슷한 모습일 것이다. 서로의 익명성을 존중하는 느슨한 관계 안에서도 우리는 얼마든지 여러 층위의 대화를 나누며 서로의 마음을 위로하고 존중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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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민해 에세이 분야 크리에이터

혼자만의 시간을 좋아하는 내향인입니다. 매일 읽고 걷고 씁니다. 어느 누구에게나 무해한 사람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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