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몰랐던 또 다른 나의 모습
새롭게 발견되는 나의 낯선 모습들을 여전히 직면하고 인정하는 중이다. 나는 과연 어떤 사람인가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시간들이 점점 많아진다. 이번 주부터 읽기 시작한 손현녕 작가의 <너무 솔직해서 비밀이 많군요>라는 책에서 저자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아는 일은 어쩌면 생에 가장 중요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말한다. 손현녕 작가는 지난번 영풍문고에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작가였는데, 그녀가 출간한 책들이 책꽂이 한 면을 온통 차지하고 있어 눈길이 갔다. 독립서적 출간을 시작으로 이제야 조금씩 이름을 알리기 시작한 것인지 작가 소개도 단조로웠다. 서가에 잠깐 서서 그녀의 글을 읽었는데 솔직하고 서정적인 문체가 나의 마음에 콕 들어와 버렸다.
그런데 나를 아는 것이 먼저라 시작했는데 알면 알수록 자기 자신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신기하게도 알아가는 과정 중에 이미 나 자신과 정이 들기 마련이라 애착이 생길 것이다. 그리고 조금 별로인 부분은 또 수리하면 되니까. 그렇게 자기 자신과 미운 정, 고운 정 들다 보면 그 어떤 성인군자, 마음 넓은 사람이 와도 그들만큼 아니, 그들보다 썩 마음에 드는 '나'를 발견할 것이다. 나는 날마다 얼마나 아는가. 그것이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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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에 친구와 대화를 나누던 중 폭탄 발언처럼 "나 이제 너무 열심히 살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다. 내가 알던 나는 작은 것 하나에도 진심을 다하고 정성을 쏟고 다듬고 가꾸고 마음을 주는 사람이지만 요 근래 회사에 여러 가지 일 때문인지 나도 그냥 막무가내로 안하무인처럼 행동하고 싶어진 것이다. 바르고 계획적이고 선량하고 올곧은 삶이 나에게 주는 가치가 대체 뭐람. 얻어맞는 사람은 계속 얻어 맞고 때리는 사람은 자기가 잘못한 줄도 모르고 때리고, 정작 주위에서는 어차피 잘 맞았으니 한 대 더 맞아도 안 죽는다고 말한다. 그럼 나는 계속 맞는 게 당연한 사람일까.
그래서 아무것에도 정성을 다하고 싶지 않아 졌다. 아무렇게나 대충 살아버리고 싶어졌다. 앞으로 내 인생은 계획도 뭣도 없이 그냥 아무한테나 의지하고 기대면서 게으르게 막무가내로 살아갈 거라고 열변을 토했다. 나의 이런 모습에 친구는 안쓰러웠는지 하고 싶은 대로 하라며 나를 다독였다. 나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정작 그렇게 모질게 뱉어놓고 막상 그렇게 살지도 못할 거면서 오기로 똘똘 뭉친 그 반항심은 대체 무엇인지. 집에 돌아오는 길에 나는 다시 친구에게 말했다.
그냥 나답게 살래
또라이를 상대하기 위한 방법을 알고 있다. 사실 굉장히 쉽다. 나도 또라이가 되면 된다. 상대가 소리 지르면 나도 소리 지르고, 상대가 때리면 같이 때리고, 상대가 욕하면 같이 욕하면서 똑같은 아니, 그 또라이보다 더 또라이가 되는 게 가장 쉬운 방법이다. 그럼에도 지금껏 나의 소신을 지켰던 것은 그들과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똑같은 사람이 되고 싶지 않다는 것은 사실 다른 누구도 아닌 나를 위한 것이었다. 결국에는 나 좋으라고 했던 거였으면서 마치 다른 사람을 위했던 것인 양 포장하는 나를 보며 역겹다는 생각이 들었다. 위선자를 그렇게 싫어하면서 정작 나의 모습이 그 위선자들과 다를 게 뭐란 말인가.
그럼에도 때로는 나의 어떠한 행동들에 해명하고 싶지 않아 지는 순간들이 있다. 나 또한 사람이니까 화를 낼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 나한테 전후 사정은 묻지도 않고 왜 화를 내냐고, 너는 그런 사람이 아니지 않냐고, 너답지 않다고 말한다면 글쎄 너는 대체 나에게 무엇을 기대하는 것일까.
기대 좀 하지 마. 나한테.
하루에도 나의 감정기복은 오르락내리락 널뛰기를 하지만 그 감정을 잔잔히 다스리는 것은 오로지 내 몫이다. 그 다스림의 과정이 싫지 않다. 그게 나고, 나는 그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는 것은 내 본질과도 같은 것이니까. 나의 감정을 타인에게 일방적으로 토로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니까. 그것은 상대를 감정노동하게 만드는 일이고 감정노동을 당하는 상대는 내게 해를 입는 것과 같다 여겨지니까. 그리고 나는 할 수 있는 한 모두에게 무해한 사람이고 싶으니까.
요즘 내 친구는 올해 8월 출간된 장강명 작가의 신작 <재수사>에 푹 빠져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라 나도 읽고 싶었지만 읽다가 중간에 포기했던 소설이다. 우선 소재 자체가 살인이라는 점, 그 대상이 젊은 여성이었다는 점이 나의 발목을 잡았기 때문이다. 그 책 덕분에 친구는 살인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왜 나쁜 것이냐는 철학적인 질문을 던졌다. '만약 살인이 범법행위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정한다면 살인은 해도 되는 것일까'하는 다소 진지한 물음이었다. 나는 흔히 우리 주변에서 발생하는 범죄행위들이 단지 법 때문에 그나마(?) 이 정도라고 말한다면 삶이 너무 무서울 것 같다는 생각이다. 물론 사회적으로 정해진 법의 테두리와 최소한의 도덕, 윤리에 반하지 않기 위해 자신의 충동을 절제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내 경우에는 그냥 싫다 였다. 그니까 그냥 싫은 거. 나는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은 것 말이다. 법이 있고 없고 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냥 나는 그런 행위 자체가 다 싫은 사람인 거다. 누가 지켜보든 지켜보지 않든 그건 중요하지 않다. 작게는 무단횡단으로도 예를 들어볼 수 있는데, 이른 새벽 신호등의 신호를 기다리지 않고 무작정 건너는 사람이 많은 구간을 알고 있다. 그 구간에서 초록불을 기다리는 것은 나 혼자. 추운 겨울에도, 아무리 바빠도 발을 동동 구르며 그냥 그 자리에 멀거니 서서 빨간불이 바뀌기를 기다리는 나는 대체 무엇 때문에 그 행위를 하고 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냥이다. 그냥.
아 쓰다 보니 주제와 관련 없는 말이 자꾸 길어진다. 이야기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어 다시 원점으로 돌아온다면 나의 모든 감정과 행동에는 정답이 없다는 것이다. 자꾸 정답을 구하려고 하니까 그 정답과 다른 선택지가 툭툭 튀어나올 때마다 나를 나무란다. 그 모습도 나인데, 다만 몰랐을 뿐인데 사람은 익숙한 것에서 안정감을 느끼니까 관성처럼 일단 거부반응부터 올라온다. 요 근래 내가 그랬고 앞으로도 점점 그럴 것이다. 왜냐하면 나는 계속 자라고 있고 앞으로도 자랄 거니까.
삶에 대해 관조하는 자세로 살고 싶었다. 가끔 우울함과 공허함이 극적으로 찾아오는 날이면, 이대로 생을 마감하는 것도 나름대로 의미 있는 일이라 생각할 만큼 꽤나 염세적인 면도 없지 않았다.
삶에 그렇게 큰 미련이 없다면 대충 살 법도 한데 나는 왜 매사에 힘을 주고 최선을 다하며 진심과 정성을 운운하는가를 곰곰이 생각해 봤다. 아마 그건 살아야 할 이유가 마땅히 있어야만 내가 이 땅에 가만히 숨을 붙이고 살아갈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살아 있어서 사는 게 아니라 살아야 할 이유(하고 싶은 일)가 아직은 많이 있기 때문에 살아가는 삶. 그 이유가 다 사라지고 나면 아무런 미련 없이 생을 마감하는 삶 말이다. 그런 삶을 꿈꿔왔다고 고고한 척 말해왔던 내가 어쩌면 정반대의 사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손현녕 작가의 책 덕분이었다.
살아야 할 이유가 분명해서 이토록 열심히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 삶에 너무도 미련이 많아 삶을 살아갈 이유를 끊임없이 만들어 가는 중이었던 것이다. 그걸 최근에서야 알았다. 나는 전자가 아니라 후자였음을. 그러니까 나는 이 고단한 삶을 너무도 사랑해서 이 삶을 놓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누구보다 더 간절하게 이 삶을 놓지 않고 싶었고, 그렇기에 더 정성스럽게 삶의 이유를 찾고 끊임없이 나를 알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나에게 삶이란 그리 특별하지도 거창하지도 않은 일상의 반복 일지 모른다. 그 반복을 얼마나 밀도 있게 가꾸어가느냐는 내 몫이고, 그 몫을 타인에게 책임 전가해서도 핑계를 대서도 안 되는 것이다. 이 또한 내가 몰랐던 나의 새로운 모습이다. 삶은 그리 거창하지 않고 그저 고양이 똥을 치우는 것과 같다는 김유연 작가의 말처럼 이제는 스스로 인정해야만 했다. 나는 여전히 이 평범한 삶을 지독하게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어느 누구보다 이 땅에 미련이 많은 사람이라는 사실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