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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Dec 01. 2022

왜 잘해주는 거야, 나한테?

누군가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은 나약한 것일까. 타인에게 기대는 것이 자신의 연약함을 증명하는 행동일까. 세상은 점점 혼자만의 시간을 강조하면서 자발적 독립만이 온전한 자유라고 말한다. 나 또한 개인주의 성향이 강한 사람이기에 사람들과 지나치게 얽히는 것을 싫어하고, 도움이 필요해도 어떻게든 혼자 해결하려고 하는 편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하고 그 생각은 더욱더 굳어졌는데, 계산기를 두드리며 자신의 이익만 챙기려 하는 이들의 모습을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역시 스스로가 강해져야 한다고 마음먹었던 것 같다.


그러던 내가 도움을 요청하지 않았음에도 목적없이 도움을 주는 손길들이 여러 번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내가 아팠을 때다. 어릴 때부터 몸이 허약했던 터라 갑작스러운 빈혈과 어지럼증이 찾아오면 몸을 가누지 못하고 픽픽 쓰러지곤 했는데, 그때마다 친구들이 그런 나를 업어다 양호실에 던져두곤(?) 했기 때문이다. 그 무조건적인 도움이 처음에는 참 낯설었다. 고맙고 미안한 복합적인 감정에 혼란스러웠지만, 너무 아무렇지 않게 당연한 거 아니냐는 친구들의 말에 입을 다물곤 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대가 없는 호의는 계속되었다. 재작년 여름 회사에서 근무하다가 회의실 문틈에 발이 끼는 바람에 발톱이 다 부러져서 응급실에 가서 발톱을 다 뽑고 열 바늘 넘게 꿰맨 적이 있다. 당시에 나는 내 발에 피가 철철 흐르는지도 모르고, '아 발이 좀 아프네?'라고 생각하며 멍하게 발을 내려다봤던 것 같다. 근데 발이 문에 꼈다가 빠지는 소리가 꽤 컸는지 놀란 주변 직원들이 우르르 몰려와서는 더러울지도 모르는 내 발을 휴지와 물티슈로 닦아주고, 지압해 주는 모습에 정작 나는 어리둥절했던 것 같다. 평소 업무로 나와 자주 날을 세우던 국장님은 구급차를 불러야 한다며 다른 팀에 도움을 요청하러 뛰어가고, 나를 업다시피 한 동료들이 응급실로 급하게 차를 몰았다. 그 모든 과정이 정말 순식간에 일어났다. 하필 퇴근 무렵이라 괜히 나 때문에 동료들까지 늦게 퇴근할까 싶어 수술 끝나고, 택시 타면 되니까 먼저 가라는 나의 말에도 괜찮다며 2시간이 넘도록 나를 기다려주었다(심지어 그때는 코로나가 한참 유행할 때라 대학병원은 보호자 외에 출입이 불가해 동료들은 병원 밖에서 나를 하염없이 기다렸다).

한바탕 소동이 끝나고, 회사로 돌아간 시간은 이미 퇴근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는데, 우리 팀 사람들은 퇴근하지 않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심지어 나와 사이가 별로 좋지 않던 국장님은 다급하게 괜찮냐며 나의 상태를 살피시는데, 그 모든 상황들에 현실감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진통제를 꼭 챙겨 먹으라며 신신당부하던 동료들의 카톡과 병가를 내고 푹 쉬라는 국장님의 카톡을 멍하게 바라봤던 것 같다. 나는 사실 우리 회사 사람들과 깊은 관계를 맺지 않으려 부단히 노력해왔기 때문이다.


세상은 결국 혼자 사는 것이라 생각하던 나였다. 도움을 청하거나 의지하는 것은 나약한 것이라 여겼다. 성숙한 인간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그 모든 것을 감당해야만 한다고 굳게 믿으며 살았다. 하지만 짧지 않은 인생 경험들을 통해 우리의 인생은 혼자가 아님을 배워가고 있다. 도움을 청하는 것 자체가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건강한 상호의존을 통해 관계를 더 돈독히 한다는 것을 말이다. 그렇게 맺어진 끈끈한 관계는 인생의 큰 기쁨, 아름다운 추억을 안겨준다. 함께 나누는 기쁨이야말로 삶의 큰 행복이라는 것을 천천히 배워가는 중이다.


프랑스 최고의 정신과 의사 크리스토프 앙드레와 긍정심리학 전문가 레베카 샹클랑이 함께 쓴 책 <나를 살리는 관계>에서는 도움을 청하는 것 자체가 연약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도움을 청하긴 하지만 스스로 상황에 대처할 수 있다고 느낀다면 그것은 건강한 의존이라고 말한다.


도움을 받아야만 발전을 하거나 행동에 매진할 수 있는 경우가 있다. 이러한 경우를 알고 도움을 청하려면 분별력이 필요하다. 자신의 욕구를 파악하고 '적절한'방식으로 '적절한'상대에게 '적절한'시기를 보아 '적절한'이유를 대면서 요청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적절한 방식은 우리 욕구를 전달하는 방식을 두고 하는 말이다. 적절한 시기는 상대가 우리 욕구에 귀 기울일 여력이 있는 때를 잘 잡아야 한다는 의미다. 불시에, 혹은 상대가 다른 일에 골몰했을 때 그런 얘기를 꺼냈다가는 쓸데없이 갈등만 더 불거질 위험이 있다. 적절한 이유란 우리가 도움을 청하는 동기가 무엇인지를 의미한다. 좀 더 발전하고 행동에 매진하고자 도움을 청하는가? 아니면 단지 노력하고 싶지 않아서일 뿐인가?
(중략)
타인을 기본적으로 경계하는 사람은 인생의 긍정적 경험을 만끽할 기회들을 내치게 마련이다. 함께 나누는 기쁨이야말로 오래가는 행복에 가장 크게 이바지하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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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와 우크라이나는 아직도 전쟁 중이다. 21세기에 이게 가능한 일인가 싶을 정도로 상황은 여전히 좋지 않다. 어서 빨리 이 끔찍한 전쟁이 끝나기만을 바라게 된다. 그리고 그 과정 속에 세계 각국 도움의 손길들은 계속 이어지고 있다. 나는 그 기사들을 접할 때마다 눈물이 난다. 얼마전 이태원에서 벌어진 끔찍한 참사의 현장 속에서도 다른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선뜻 나섰던 의로운 이들의 모습 또한 마찬가지다. 세상이 아무리 각박해졌다지만, 누군가의 목적 없는 선의는 보는 이를 감동하게 한다. 인류애가 살아있음을 다시 한번 깊이 실감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모습들을 보며 나도 다시 다짐한다. 도움을 청해오는 이가 있으면 선뜻 그 손을 잡아주는 사람이 되자고 말이다.


잊고 있었던 것인지, 잊고 싶었던 것인지 사실 나는 살아오면서 수많은 이의 목적 없는 도움을 많이 받고 자랐음에도 그 부분을 간과할 때가 많았다. 오늘에서야 그 감사함을 다시 마음속에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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