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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Dec 16. 2022

조율하는 법을 배우지 못 했습니다

한때 상담사를 꿈꿨을 만큼 상담이라는 분야에 관심이 많은 편이다. 특히 요즘은 정신과 마음의 건강에 관심을 갖는 이들도 늘어가는 추세다. 덕분에 정신과나 상담에 대한 진입장벽 혹은 편견들이 많이 사라지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내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정신과나 상담소는 살면서 다들 꼭 한 번씩은 방문해 봤으면 하는 마음이다. 특히 우리 윗세대(기성세대)의 경우 먹고사는 것에만 치중하다 마음이 멍들어가는 것을 놓치고 뒤늦게 요즘 세대와 불필요한 마찰을 일으키는 것을 볼 때면 자신의 마음 상태를 살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여실히 깨닫게 된다. 더 나아가서는 정서적 교감의 결여가 이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고도 느껴진다. 보편적인 가정의 경우 내 자녀를 먹이고, 입히고, 공부시키는 것에만 치중하다 정작 그 아이의 목소리는 들어볼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경우가 많다. 다 자란 자녀가 부모와의 소통에서 벽을 느끼는 것도 이 때문이라 생각한다.

우리는 물만 주면 자라는 식물이 아니다(아 물론 식물을 비하하려는 뜻은 아니다).


나는 부모님, 특히 엄마와 대화를 하면 할수록 갈등의 골이 깊어지곤 하는데, 아마 위와 같은 이유 때문일 것이다. 정서적 교감을 나눈 적이 없는데 좋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니 서로 좋을 때는 괜찮지만 문제가 생겼을 때는 기반이 약해 무너지고 마는 것이다.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은 채 이불로 덮어놓고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을 테니까. 


한때는 엄마도 나와의 관계를 심각하게 생각해 상담에 관심을 보이셨던 적도 있다. 내가 받았던 상담을 당신도 받아보고 싶다며 웬일로 신청을 하셨지만, 결국 받지 않으셨다. 이유는 뻔했다.

시간이 없어서.

문득 나는 궁금해졌다. 마음의 건강을 살피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길래, 딸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무엇이길래 시간이 없다는 것일까. 돈이 없어서도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나의 결론은 이렇다.

시간이 없어서가 아니라 그런 것(?)에 투자할 시간이 없어서라고.


결국 우리 관계는 진척이 없었다. 부딪히는 일에는 여전히 부딪히고 엄마는 그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시지 않는다. 그저 내가 예민해서라고 일단락시키며 나를 나쁜 딸로 몰아간다. 나는 이제 그 상황에 익숙하고, 엄마의 그런 태도에 그러려니 한다. 다만 그 상황이 도래했을 때는 철저하게 거리두기를 하면서 상황이 지나가기만을 방관한다. 내 책임이 아니니 나도 더 이상 책임지려는 노력을 쏟지 않는다. 내 쪽에서 아무리 손을 내밀고 다가가려 해도 상대가 마음의 준비가 되어있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다. 엄마의 마음 토양은 나와 대화할 준비가 되어있지 않기 때문이다.


한때는 나도 나만 잘하면, 나만 진심이면 언젠가는 상대도 그 진심을, 그 마음을 알아봐 주지 않을까라는 헛된 기대를 품었던 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건 정말 헛된 기대였다. 내가 아무리 바르고 고운 말을 해도, 그것을 아니꼽게 듣는 상대는 여전히 아니꼽게 듣는다. 정작 정신과를 방문해야 하는 사람들이 병원에 오지 않고 상처받은 사람만 병원을 찾는다는 정신과 선생님들의 말씀이 틀린 말이 아니다. 상처를 준 사람은 상처를 줬다는 것에 관심이 없다. 당한 사람만 다친 마음을 살피려 그곳을 방문하는 아이러니.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상담에 관심이 많고, 마음이 건강하지 못하다 여겨질 때뿐만 아니라 일상에서도 상담을 받는 것에 거리낌이 없는 편이다. 오히려 주기적으로 받으려고 노력하는 편. 덕분에 10월에는 심리극이라는 새로운 장르의 상담 프로그램을 다녀왔었다.


* 사이코드라마는 심리극, 정신치료극 등으로 불린다. 연극적인 기법을 이용하여 개인의 마음을 살펴보고 이전과는 다른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도록 하는 심리 치료다. 




12월 초에는 5회기의 상담을 마쳤다. 제대로 종결해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한 번은 상담 선생님과의 마찰로 내쪽에서 일방적으로 종결했었고, 다른 한 번은 코로나가 한참 기승을 부리던 시기라 어쩔 수 없이 중단되고 말았다. 그중 선생님과의 마찰로 종결되었던 상담은 상담에 대한 편견까지 생길 정도로 좋지 않은 경험이었다. 그분은 나를 내담자이기 이전에 한 명의 고객으로 대하는 태도를 선명하게 보였다. 그렇게 시작된 균열은 불신으로 이어져 가장 솔직하게 내면을 털어놓아야 하는 상담과는 맞지 않다 결론짓고 종결을 택했다.


5회 차의 상담을 무사히(?) 마치면서 마지막 날은 선생님과 포옹을 하며 작별인사를 나눴다. 상담기간 중 선생님은 나를 괴롭히는 문제들을 깊이 파고들며 질문해주시고, 객관적인 시선으로 진단해주셔서 내가 스스로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을 천천히 만들어주셨다. 이번 상담을 통해 내가 이제껏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못한 점도 깨달을 수 있었는데, 바로 조율이다.


나의 가장 큰 착각이 있었다. 내가 조율을 잘 하는 사람이라는 것 말이다. 나는 정말 그렇게 믿었다. 평소 피상적인 대인관계는 대체로 원만했던 나이기에 깊은 관계를 맺지 않는 이상 조율하는 데는 큰 부딪힘이 없었다. 다만 관계가 깊어지면 문제가 생겼다. 서로에 대한 기대치, 더 정확히는 내가 상대에게 바라는 기대치가 커질수록 조율하는 과정이 어려웠다. 내가 좋아하는 것을 나만큼 좋아해 주길 바라는 나의 집착스러운 기대가 스멀스멀 올라오고, 그 기대치에 부합하지 못하는 상대의 모습에서 서운함이 올라왔다. 나의 제안을 거절당하는 것이 나를 거절당하는 것이라 여기며 애써 열었던 마음의 문을 혼자서만 굳게 닫아걸어버린 적도 여러 번 있었다. 나의 이 어리숙한 모습들의 원인은 모두 한 가지로 귀결되었다.

바로 조율이다.


한때 이브는 나의 가장 가까운 친구였다. 오랜 시간 나는 이브가 곁에 없는 나를 상상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제 우리의 세계는 달라지고 있었다. 다른 존재로 분화되기 시작한 두 마음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할 수 없다. 이브와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런 결론을 내린 이후로는 점점 이브와 만나는 일도 줄었다. 오랜 친구를 포기하는 일도 성장의 일부인지도 모른다고, 모든 관계는 변화할 수밖에 없다고.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했다.

<방금 떠나온 세계_인지공간> 김초엽


나는 자라온 환경에서 조율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사람이었다.



어릴 적 엄마의 말은 절대적이었다. 나의 의견 따위는 필요 없었고, 엄마는 그 모든 의견을 반항이라 생각했다. 감히(네까짓 게) 말대꾸하는 거냐며 버릇없다고 나의 모든 의견들을 묵살했고, 나는 그렇게 점점 입을 닫았다. 엄마는 늘 당신만의 계획들이 있었고 나는 그것에 토 달지 않고 따라야만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상대의 말에 반대의견을 내는 모든 행위가 다 잘못이라 여겼고, 해서는 안 되는 일이라 생각했다. 말 그대로 조율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순응하는 법만 배운 것이다.


내 세계에 조율이라는 단어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기에 내가 좋아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상대에게 서운함을 느끼고, 나를 거절한 것이라 단정지은 것이다. 이 어린 모습은 나와 밀착된 관계일 때만 불쑥불쑥 올라왔고, 평소와 다른 나의 갑작스러운 모습에 상대들은 어리둥절했다. 그렇게 균열이 시작되면 나는 '역시 나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없다'라고 혼자 단정 짓고는 헤어짐을 고했다. 이 헤어짐에서 조차 조율이 없었다. 일방적인 통보에 가까웠으니까.


조율하는 방법을 배우지 못했다는 선생님의 말씀에 머리를 세게 한 대 얻어맞은 것 같았다. 타인의 반응에 민감한 나는 어쩌면 그냥 흘려들어도 될 모든 말과 행동에 일일이 반응하며 혼자 상처받곤 했는데 그때마다 조율하지 못하는 나의 어리숙함이 함께 튀어 오른 것이다. 부딪힐 바에야 피하는 쪽이 낫겠다 싶어 입을 닫았고 설명하지 않은 채로 한 명, 한 명 관계를 정리해갔다.


선생님은 상담 마지막 날, 그럼에도 나의 정신적 성숙도가 높기에 충분히 해결이 가능한 숙제라고 말씀해주셨다. 앞으로 내 삶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들어오고 나갈지, 더 깊어질지 알 수 없으나 조율하지 못하는 나의 결핍이 꼭 나쁜 것이라고 속단하지는 않기로 한다. 덕분에 나는 또 배울 것이 생겼다.

오답노트는 계속 만들어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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