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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Dec 22. 2022

아무튼, 오빠

승진 축하해

친구가 없는 것도 아니면서 어릴 때부터 유독 두 살 터울의 (친)오빠를 졸졸 따라다녔다. 또래의 여자친구들과 소꿉놀이를 하면서 고상하게 앉아있자니 성에 차지 않았던 것일까, 아니면 어디 한 군데가 다치고 깨져야 직성이 풀렸던 것일까. 오빠가 친구들과 하는 놀이들은 대체로 거칠어서 한참 놀다 보면 무릎이며 팔이며 성한 곳이 없는데도 껌딱지처럼 늘 따라다녔다. 어린 여동생을 데리고 다니는 게 귀찮고 창피했는지 오빠는 내가 잠깐 한눈을 팔 때면 도망치듯 후다닥 집 밖으로 뛰쳐나갈 때도 있었지만, 어림없지.

나도 그리 만만한 껌딱지는 아니었다(훗).


그렇다고 우리가 사이가 좋았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아니올시다다.

그럴 리가 있나. 여느 집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말싸움이며 몸싸움이며 가리지 않고 서로의 주장을 내세웠지만, 몸이 자라면서 남녀의 힘 차이가 생긴 뒤로 오빠는 더 이상 나를 힘으로 이기려 들지는 않았다. 오히려 늘 져주는 편이었고, 말싸움으로도 나를 이기지 못할 때면 분을 삭이며 혼자 씩씩거리곤 했다. 그렇게 별 것도 아닌 걸로 앙숙처럼 싸우다가도 행여나 내가 밖에서 누구한테 맞거나(?) 괴롭힘을 당하기라도 하면 오빠는 득달같이 달려가 그 상대에게 똑같이 보복(?)을 해주곤 했다. 내 뒤에 항상 오빠가 있어서인지, 그 존재를 알고 난 뒤로는 또래 남자아이들은 더 이상 나를 건드리지(?) 못 했다.


오빠는 뭐든 다 잘 하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부터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각종 여러 분야의 경시대회에서 상도 받았고, 학교에서도 선생님들은 나를 보면 오빠 동생이라는 이유만으로 예뻐해 주시기도 했다.

"아 네가 OO이 동생이구나?"

엄마가 학교에 가도 엄마를 모르는 선생님이 없을 정도로 오빠의 학창 시절은 꽤나 유명했고, 상대적으로 부진한 내가 비교 순위에 오를 때가 많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아니, 오히려 좋았다. 나에게 오빠는 오빠의 이름만으로도 힘이 되는 든든한 존재였으니까.


어딜 가나 칭찬을 받는 오빠에 비해 어릴 때의 나는 참 평범했다. 키도 좀 평범하기라도 했으면 좋았으련만 내 키는 평범은 커녕 꼬꼬마에 가까웠고, 그건 지금도 변함없이 여전하다(160은 넘을 줄 알았지). 반면에 오빠는 어릴 때부터 키가 컸다. 성장기에는 더 쑥쑥 자라더니 나와는 격차가 훨씬 더 벌어지고 말았다. 지금도 나랑 같이 있으면 사람들이 남매가 하나도 안 닮았다고 말한다. 심지어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가 많고, 툭하면 픽픽 쓰러지는 나와 달리 오빠는 무한체력을 뽐내며 지치지도 않았다(지금도 여전히). 공부는 엉덩이 싸움이라는 말도 있던데, 오빠는 그 싸움에서 누구보다 자신이 있었고 옆에서 지켜본 바로는 정말 지독하게 공부하는 사람이었다(졸린다고 손등을 칼로 긁어가며 공부하던 모습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오빠는 소위 말하는 명문대에 어렵지 않게 합격했고, 그 힘들다는 취준생의 시절은 겪어보지도 않은 채, 대학교 4학년 마지막 학기에 이름만 대면 다 알 법한 대기업에 당당히 입사했다. 어디 그뿐인가. 신입사원 연수 기간 마지막 날에는 신입사원 대표로 당시 기사까지 났을 정도니 뭐. 말 다했지.


집안의 대소사에도 나는 늘 오빠의 울타리 안에서 안전하다 생각했다. 부모님이 하루하루 나이 들어가시는 게 보일 때마다 걱정스럽고 불안한 마음도 올라왔지만, 오빠가 있다는 생각에 든든했다. 가끔은 서로 읽은 책 이야기를 나누며 지적인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했다. 오빠는 주로 고전, 서양문학과 인문학을 좋아하고 나는 현대문학, 그중에서도 한국 소설을 가장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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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끝없이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오빠의 인생에도 큰 시련이 찾아왔다. 누구보다 건강하던 오빠에게 닥친 암이라는 병은 우리 가족, 특히 엄마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 만큼 큰 아픔이었다. 그나마 초기에 발견되어 수술을 통해 완치될 수 있었지만 그때부터 오빠는 평생 호르몬 약을 먹어야만 했다. 그 일을 계기로 우리 가족에게도 많은 변화가 찾아왔는데, 무엇보다 건강을 가장 우선시한다는 점이다.


지금 오빠는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는 사람 같다. 완치 후 건강을 위해 시작한 마라톤이 이제는 인생 운동이 되었기 때문이다. 지금도 마라토너로 열심히 활약하며 여기저기 대회에 출전해 수상을 하고, 내년에는 해외 마라톤에 출전하겠다는 원대한 목표도 세우고 있다. 참 대단한(독한) 사람이다.


어제 근무 중에 오빠에게 갑자기 전화가 왔다. 내가 근무 중인걸 알고 있을 텐데도 카톡이 아닌 전화를 굳이 했다는 것은 꽤나 급한 일이라는 것.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어 걱정스러운 마음에 다급하게 다시 전화를 걸었는데, 웬걸. 너무 기쁜 승진 소식을 전했다. 오빠의 지금 직장은 오빠의 첫 직장이다. 한 번의 이직도 없이 꾸준히 커리어를 쌓아가는 오빠의 모습이 대단하다 느껴져 오래오래 다니라고, 평생 뼈를 묻으라고(?) 덕담(이라 쓰고 악담이라 읽는)을 건넸다. 조만간 만나 얼굴을 보며 축하를 전해야겠다. 진급턱을 내겠다는 오빠의 신남이 수화기 너머로도 고스란히 느껴져 나도 덩달아 기분이 좋았다.



오래전 아빠의 휴대폰에 저장된 오빠의 이름을 본 적이 있다. 선명한 네 글자가 아직도 생생하다.


"나의 미래"


그래, 오빠는 아빠의 미래다. 나도 인정!


그럼 나는요?


나도 전화를 걸어본다. 신호가 간다. 아빠의 핸드폰을 가만히 내려다본다.


나의 천사



처... 천사요...?


아, 아빠 미안해. 내가 더 잘할게.

실은 날개 잃은 천사야 나. 아참 기억도 잃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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