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민해 Apr 13. 2023

이별이 없는 사이

올해 초 김혜진 작가의 <경청>이라는 책을 읽다가 우연히 알게 된 영화가 있다. 바로 <노매드랜드>라는 영화다. 노매드란 사전적 의미로 유목민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데, 이 영화는 2017년에 출간된 <노마드랜드>라는 책을 원작으로 하고 있다.

김혜진 작가의 <경청>에서는 이 영화의 몇몇 장면들이 살짝 묘사되어 있었는데, 왠지 모를 그 분위기에 이끌려 영화까지 보게 되었다.


모닥불 주변에 사람들이 모여 있다. 멀찌감치에 자신의 차를 세워 둔 채로. 그들에게는 집이 없다. 그들은 최소한의 생필품을 싣고 다니며 차에서 산다. 돈이 필요하면 파트타임으로 일하고, 안전하고 조용하게 밤을 보낼 주차 공간을 찾아 떠돈다. 그들은 공중 화장실에서 몸을 씻고, 코인 세탁소에서 빨래를 한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농담을 건네고 내밀한 사연을 털어놓으며 외로움을 물리칠 줄도 안다. 그런 식으로도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이 영화는 2008년 금융위기로 붕괴된 한 기업 도시에 살던 여성 '펀'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다니던 공장이 폐쇄되면서 순식간에 실업자가 된 데다 남편마저 암으로 사망하면서 그녀의 삶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대출금을 갚기 위해 집을 팔고 낡은 밴에서 유목생활을 시작한 그녀는 자신과 비슷한 사연을 갖고 유목 생활을 이어가는 이들과 만나고 헤어지며 치유와 위로의 과정을 거쳐간다. 그 과정 속에 가장 좋았던 대사가 있었다.


이 생활을 하면서 가장 좋은 건 영원한 이별이 없다는 거예요.
늘 ‘언젠가 다시 만나자’라고 하죠.

그리곤 만나요.

-

인간관계에 꽤 무거운 기준을 두고 있지만, 그럼에도 나는 늘 이별에 약하다. 변질된 관계는 꼭 정리하고야 마는 나의 냉혹한(?) 모습 덕분에 누군가는 올해 정리할 관계의 할당량을 다 채웠냐는 농담을 건네기도 했다. 남들이 보기에 다소 차가워 보일지도 모르는 나의 관계 정리가 실은 정말 아픈 것이라는 걸 알고 있을까. 망가져가는 관계의 끝을 차마 보지 못해 결국 내가 먼저 손을 놓고야 마는 그 아픔을 알고 있을까. 관계의 불씨가 서서히 꺼져가기 시작할 때 나는 온 마음이 무너져내리는 기분이다. 가까운 관계일수록 심장이 녹아내리는 기분, 뻥 뚫리는 기분. 쿨하게 인사를 건네고 멀어져 가는 상대의 뒷모습을 확인한 뒤에야 비로소 다리에 힘이 풀려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린다. 새드엔딩을 보지 못해 영화 보기를 중단했던 적이 여러 번, 내 삶도 마찬가지다. 변질된 관계를 내 눈으로 직면하다 이내 고개를 돌리고 결국은 종결을 선언하고야 마는 나의 심정을 누가 알까.

그래서 이 영화의 대사가 오래 기억에 남았다.


"늘 ‘언젠가 다시 만나자’라고 하죠. 그리곤 만나요."


헤어짐이 없는 관계 같아서, 다시 돌아가면 그때의 우리를 언제든지 다시 소환할 수 있을 것만 같아서 좋았다. 흔히 연애가 끝나고 재회를 묻는 경우가 있다. 나는 그때마다 고개를 저었다. 내가 생각하는 재회, 내가 그리워하는 재회는 상대방과의 재회가 아니라 과거에 행복했던 우리였기에. 그 모습을 다시 찾을 수 없다는 것을 알기에. 그 기대치를 채우지 못할 바에는 헤어지는 쪽이 서로를 위해 좋다고, 서로를 더 미워하기 전에 이쯤에서 아름다운 이별을 선택하는 것이 좋을 거라고. 다시 만나봤자 변해버린 상대의 모습에 다시금 차오를 그 공허감을 견딜 자신이 없어서 그렇게 이별을 택하는 것이다. 꼭 연인뿐만이 아니었다. 친구도 가까운 지인도 다 마찬가지였다.


영원한 관계란 과연 가능한 것일까. 서로의 정성과 노력, 진심이 계속 닿아있다면 가능하겠지만, 아직도 나는 그 답을 명확히 찾지 못했다. <떠날 때가 된 인연들>이라는 글을 쓴 현요아 작가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경계 안에 사람들을 들여놓지 않겠다고 말했다.


버림받은 채 속상해할 내 미래가 무서워 몸을 돌돌 마는 모습이 꼭 고슴도치 같기도 하지만 그 누구도 내밀한 경계에 들이지 않음으로써 드는 편안함이 있다. 그런 단단함이 있다.


그녀의 모습에서 나를 본다. 내 마음의 빗장을 단단히 걸어두는 것이 그녀의 모습과 하나도 다르지가 않다. 다가가지도 멀어지지도 못하는 딜레마가 여전히 내 발목을 잡는다. 불변하는 관계란 과연 존재하는 것일까.

매거진의 이전글 사람을 더 깊이 알아가고 싶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