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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Apr 17. 2023

슬픔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있다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한다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박준



-

올해 초 독서모임에서는 '시'를 주제로 한 낭독모임이 열렸다. 각자 5편 이상의 시를 준비해 순서에 구애받지 않고 대화를 나누며 자유롭게 낭독하는 흐름이었다. 나는 총 4권의 시집을 챙겨갔고, 그중 5편의 시를 낭독했다. 신기한 건 그 5편의 시 중 유독 겹치는 주제가 있었으니 바로 '슬픔'이다.


시를 낭독하고 감상을 나누던 중 나도 모르게 "저는 슬픔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을 좋아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참석했던 모임원 중 한 분은 "왜 슬픔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이 좋아요?"라고 물어보셨다. 명료한 답을 드리고 싶었지만 갑작스러운 질문에 긴장한 나머지 두서없는 말들만 어버버하다 집으로 돌아온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내내 답답했다.


'그러게, 나는 왜 슬픔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을 좋아하지?'


우선 내가 말하는 '슬픔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은 자신의 슬픔을 일방적으로 토로하는 사람들이 아니다. 일명 감정 뱀파이어, 에너지 뱀파이어 등 각종 빌런 같은 별명으로 불리는 류의 사람들. 자신의 감정만 앞세운 채 상대가 무조건적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위로하기만을 바라는 류의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들은 나도 싫다. 자신이 필요할 때만 찾고,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다 싶으면 또 다른 먹잇감을 찾는 감정 하이에나 같은 사람들. "나 좀 어떻게 해줘", "나 너무 외로워"만을 토로하는 일방적인 사람들. 자신의 숙제를 자신의 숙제로 인지하지 못하고 남이 무조건적으로 자신을 수용하기만을 바라는 그런 이기적인 사람들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사람이니까 누구나 우울하고, 슬프고, 공허하고 그러다가도 또 웃고, 울고, 장난을 치는 그런 다채로운 존재다. 그럼에도 '슬픔의 정서를 가진 사람들'은 내면에 담긴 슬픔이라는 정서에 유독 집중하는 사람들이다. 보여지는 모습은 평온해 보이지만 그 속에 큰 슬픔을 안고 가는 사람들, 너무 일찍 철이 들어버린 어린아이처럼 말이다. 자신의 슬픔을 꾹꾹 참아오다 감당하지 못하고 이내 쏟아져 내릴 것만 같을 때조차 눈물을 꾹 참고 하루를 버텨가는 이들. 나는 그런 이들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사람이고 싶었다. 슬프다는 말조차 조심스러워 말을 삼키는 이들의 슬픔을 먼저 알아보고 다가가는 사람이고 싶었다. 나도 그랬으니까. 내 기저에 깔려있는 슬픔과 우울, 불안과 괴로움 등의 복합적인 감정을 차마 토해내지 못해 억지로 꾸역꾸역 삼키다 체하고 마는.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체한 그 마음을 안고 동굴로 숨어버리는 그런 사람.


기쁨도 있고 즐거움도 있는데 유독 슬픔이라는 정서에 내가 더 끌리는 것은 슬픔이라는 감정은 제대로 존중받지 못하는 것 같다는 생각 때문이다. 누군가에게 자칫 어두운 사람, 우울한 사람으로 비춰지는 그들의 슬픔에 나는 눈길이 간다. 부정적인 감정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는 것 같은 그 감정에 유독 더 몰입한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는 박준 시인의 문장처럼 슬픔의 정서는 자랑이 될 수도 있고 표현할 자유도 있다. 나에게 참 행복이란 무조건 즐겁고 웃는 일만 가득한 삶이 아니라 웃고 싶을 때 웃고, 울고 싶을 때 울 수 있는 감정의 자유가 있는 삶이다.


‘안녕’이라는 단어는 '아무 탈 없이 편안함'을 뜻한다고 한다. 나는 당신의 그 슬픔도 안녕하길 바란다. 눈물 버튼이 꾸욱 눌려야만 비로소 슬픔을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슬픔 그 자체로 당신은 충분히 당신의 감정에 충실하고 있다고, 그 감정이 안녕하길 바란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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