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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Apr 23. 2023

결국은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날 이야기

어릴 때부터 이것저것 잡다하게 쓰는 것을 좋아했다. 일기가 됐든, 감정이 됐든, 메모가 됐든 그냥 막 써 내려갔다. 그때만 해도 당연히 손글씨였고, 무지 노트에 순서 없이 떠다니는 말풍선은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나이가 들고 관계가 넓어지면서 나는 잘 듣고, 잘 읽는 사람이고 싶었다. 잘 듣고, 잘 읽고 나니 다시 잘 쓰고 싶어졌다. 타인들의 기준에 나를 욱여넣지 않고 그저 나답게 유영하기를 바라는 마음을 오래 기억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계속 써야만 했다.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는 그 구멍을 자꾸 들여다볼수록 우리 마음은 받아들이는 힘도 커지고, 통찰력도 생기기 때문에 쓰는 것을 멈추지 말고 그에 대한 질문을 자꾸 던져야 한다는 손현녕 작가의 말처럼, 나의 글도 비슷한 마음이다. 지식을 전달하기 위한 전문적인 글도 아니고, 그렇다고 삶을 통달한 인생의 지혜를 설파하는 글도, 또 그렇다고 창작물로서 문학적 가치가 있는 글도 아닌 그저 나의 고유한 삶 그 자체. 소소한 일상, 떠오르는 생각의 단상, 감정의 미세한 변화를 엮어 글로 풀어내는 글쓰기지만 그것만으로 나는 매일이 충만해졌다. 그런 내가 글을 쓸 때 함께하는 것이 있다면 그건 단연코 책일 것이다. 책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조언자이자, 위로자였다. 나의 감정기복과 상관없이 나는 매일 읽었다. 읽는 삶이 지속될수록 단편적으로만 쓰던 나의 글을 제대로 쓰고 싶어 지기 시작했다.


지친 하루를 보내고 온 날은 몸이 피곤해 키보드 자판 위에 손을 올려놓는 것조차 버거웠던 때도 있었고, 누군가와의 마찰로 마음에 독기가 차올랐을 때는 그 사람을 비난하는 글로만 한 면을 가득 채우고 싶다는 비뚤어진 생각을 할 때도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계속 무언가를 쓰는 사람이었다. 읽는 게 많아지면 어느 순간부터는 자신의 글을 쓰고 싶어 한다고들 하던데(혹은 자신의 책을), 나도 그와 비슷한 감정인지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행위 자체로 충분히 유의미한 일이라 생각했다. 누군가는 입으로 말하는 것을 좋아한다면 나는 글로 떠드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에 가까운 것뿐. 작가라는 호칭도, 작가 지망생이라는 호칭도 다소 무겁다. 나는 그냥 계속 쓸 뿐이었고 식욕을 채우는 것처럼 글쓰기에 대한 나의 욕구를 충족시켜야만 했다.


사실 쓰는 사람이라는 정체성은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줄 때도 많았다. 되도록 말을 아끼면서 늘 무언가를 읽고 쓰고 있는 나의 행위에서 느껴지는 진중함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나는 때에 따라서는 물렁한 사람이 되고 싶기도 했다. 단단하고 강단 있는 것도 좋은데 너무 단단하면 또 차가워 보이니까 가끔은 적당히 따뜻해지는 그런 정도의 물렁한 사람. 내 생각만 내세우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에 혹은 상처받은 서사에 마음의 빗장을 걸어 잠그지 않는 사람. 말로 덧대지 않고 다정한 언어의 힘을 빌려 포근하게 감싸줄 수 있는 그런 사람이고 싶었고 그런 글을 쓰고 싶었다.

<나는 당신을 편애합니다>의 저자인 손현녕 작가는 앞으로 어떤 책을 쓰고 싶냐는 누군가의 질문에 거창한 책이 아닌, 공감과 위로를 줄 수 있는 책을 쓰고 싶다 말한다.


저는 이미 그 글을 쓸 때의 구렁텅이에서 빠져나왔을지라도, 그렇게 글을 써두었으니 혹시나 같은 구렁텅이에 빠진 사람이 제 책을 읽는다면 조금은 위로가 되지 않을까 해서요. 저보다는 조금 덜 아파하고 제가 겪은 시간보다는 조금 더 빨리 헤어 나오는 데 도움이 되는 책을 쓰고 싶어요. 누군가 한 사람에게는 가장 편애하는 책이 되었으면 해요. 게걸스럽게 빨리 먹어치우는 책보다 책장을 덮은 후에도 여운이 남고 잠시나마 사색을 할 수 있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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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 나에게 같은 질문을 한다면?

어떤 글을 쓰고 싶냐고 물어본다면?

나는 나를 닮은 글을 쓰고 싶다 말할 것이다.

읽는 이로 하여금 나의 글이라는 것을 알아볼 수 있을 만큼 나답게 쓰여진 글 말이다. 물론 그 글에 대체로 온기가 담겨있기를 바라지만, 나는 나를 안다. 때로는 지나치게 냉소적이고 염세적인 모습도 드러날 것이라는 것을. 꾸며내는 건 질색이다. 거짓으로 점철되길 바라지 않기 때문에 나는 차가운 글도 쓸 것이다. 온기가 빠져도 누군가를 일방적으로 비난하지는 않을 것이라 다짐하며 나의 솔직함이 누군가에게 무례함으로 닿지 않도록 정직하고 솔직한 나만의 글을 담아내고 싶다. 나는 매일 쓰는 삶과 더불어 읽는 삶도 이어가고 있다. 읽고 쓰기의 비율이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아야 나의 말과 생각이 독이 되지 않았다. 너무 읽기만 했다 싶을 때는 중간중간 내 생각을 글로 토해내야만 했고, 너무 쓰기만 했다 싶을 때는 활자로 머릿속을 채우고 싶은 욕구가 차올랐다. 책을 통해 내가 몰랐던 세계를 간접적으로 경험하고, 생각을 확장시키며 더 깊이 사색하는 법을 배워갈 수 있었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도 글을 쓸 때 가장 영감이 되어주는 것은 사실 나다. 나는 내가 경험하고, 생각하고, 느낀 것들을 토대로 글을 써 내려간다. 직관적으로 받아들인 무언가를 단편적으로 써 내려가기도 하고, 어떠한 상황에 놓였을 때 그 상황을 통해 느끼고 사유한 것을 바탕으로 글을 적어 내려가기도 한다. 모든 것이 나로부터 시작되어 나로부터 끝난다. 물론 나로부터 시작되었음에도 아직 끝나지 않은 일들도 많다. 마침표를 찍는 게 내가 되어야 할지 남이 되어야 할지 아니면, 영원히 미제로 남겨둔 채 삶을 마감하게 될지 알 수 없는 일들도 있다.


생각해 보면 글을 쓸 때도 그렇고, 어떤 일을 새롭게 시작할 때도 나는 늘 마무리를 짓고 싶어 했다. 무슨 일이든 일단 시작했으면 마침표를 꼭 찍어야만 했던 것이다. 하지만 to be continued 처럼 남겨두어야 할 일들도 존재한다. 무언가를 덧대지 않고 있는 그대로 흘러가도록 둬야만 하는 일들도 분명 존재한다. 그건 어쩌면 내가 손 쓸 수 없는 일들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내가 그 모든 것을 다 통제할 수 있을 거라 자만했던 것은 나라는 존재의 오만함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내가 뭐라고, 내 글이 뭐라고.


그럼에도 나는 나라는 존재의 영감 덕분에 계속 써 내려갈 힘을 얻는다. 나를 치유하고자 글을 쓰기 시작했고, 그 중심에 늘 사람이 있었다. 그리고 그 사람들 중에는 내가 있었다. 더 정확히는 내가 중심인 글이 있었고 그게 곧 나였던 것이다. 또 이렇게 나로 시작해서 나로 끝나는 이야기. 나는 나를 잘 모른다 말하면서도 나라는 인간을 가장 애틋하게 여기는 것 같다. 진지한 자기애가 때로는 낯간지럽고 우스꽝스럽기도 하지만 또 그런 나이기에 좋다.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읽고 쓰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처럼 계속 읽고 쓰다 보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을 거라고도 믿는다. 그런 내가 나의 글쓰기에 지치는 일이 없도록, 계속 쓰는 삶을 위해서라도 계속 읽는 내가 될 것이다. 타인의 글뿐만 아니라 타인의 삶도 읽어나갈 수 있는 내가 될 수 있기를 오늘도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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