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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May 07. 2023

14년 지기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다른 나라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한국은 유독 오래가는 인간관계를 높이 평가한다. 인내하며 오래 살아낸 노부부의 사랑을 아름답다 하고, 오랜 세월 사귄 연인과 헤어지는 것을 나무란다. 학창 시절 친구가 점점 불편해지지만 오랫동안 알고 지낸 의리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고통스러운 만남을 이어간다.
관계는 현재진행형이다. 늘 처음 만나는 사람들처럼 세심하고 조심스럽게 관계를 다져가는 성의를 보여주는 사람만이 시간이 흘러 현재의 관계에서도 살아남는다. 그러니 과거에 친분을 맺은 기간이 아무리 길었어도 지금 점차 멀어져 가는 사람들에 대해 무리한 책임감이나 죄책감을 느끼지 않았으면 좋겠다.

<자유로울 것> 임경선



올해로 14년 지기가 된 친구들이 있다. 스무 살, 대학에서 처음 만난 우리는 사회생활에서 만난 친구는 진정한 친구가 아니라는 진부한 통념에서 벗어난 끈끈한 관계였다. 뭣도 모르고 부딪히듯 시작된 대학생활은 그저 정해진 시간표만 따라가면 됐던 초중고와 달리 모든 행동에 책임이 따랐다. 내가 고른 전공부터 전쟁 같은 수강신청으로 얻어낸 교양 수업 하나하나까지 모든 게 다 나의 결과물이고 책임이었다. OT, MT, 각종 학과 행사와 축제 등 낯선 사람들과의 끊임없는 교류와 학교에서 펼쳐지는 모든 대소사가 나에게는 혼란스러움 그 자체였다. 그나마 마음 붙일 곳을 찾아 사진 동아리에 들어갔지만 술로 시작해 술로 끝나는 선배들의 패턴에 어지러움을 느꼈다(물론 그때의 나는 꽤나 주당이었다는 TMI를 남기며).


모든 게 어리숙했던 그때 그 시기에 만난 우리 4명(나 포함)은 고등학생 때처럼 늘 붙어 다녔다. 한 명을 제외하고 (사진)동아리마저 같았던 세 명은 특히나 더했다. 신기하게도 누구 하나 휴학 한 번 없이 대학교를 졸업했다. 시작점은 달랐지만 10년이 지난 지금도 우리는 여전히 그때의 전공을 살려 사회생활을 하고 있다. 가끔 회사에서 모르는 부분이 있으면 서로 의견을 교환하기도 하고, 각자의 경험담을 조언 삼아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는 든든한 관계였다. 대학교를 졸업하면 자연스레 연이 끊어질 거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과 달리 우리의 관계는 졸업 후에도 계속 이어졌다. 학창시절에는 여름방학과 겨울방학에도 만나 바다며 산이며 여행을 다니더니, 사회인이 되고는 휴가날짜까지 맞춰가며 아무리 바빠도 1~2년에 한 번씩은 함께 모여 밤을 보냈다. 친구들을 만날 때면 스무 살의 내가 떠올라 좋았고, 날이 새도록 술잔을 부딪혀가며 서로의 이야기에 심취했다. 가끔은 변해가는 서로의 모습이 낯설다가도 새벽까지 이어지는 수다 삼매경에 다시금 그때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하지만 익숙한 패턴이 반복될수록 나는 또 생각이 많아졌다. 익숙해서 편한데, 익숙해서 당연해진 관계가 지속되는 것만 같았다. 균열의 조짐이 조금씩 보이기 시작하는데 그걸 명민하게 알아차리지 못했다. 오고 가는 무례한 말들과 거침없는 조언(을 빙자한 막말)들, 서로를 배려하지 못하는 말들, 직장에 대한 끊임없는 욕과 푸념들, 각자의 가치관과 취향을 존중하지 않는 선을 넘는 간섭 등 온갖 말들이 난무했다. 예의는 날아간지 오래고 정성과 진심마저 의심하게 만드는 이 무성의한 말들은 대체 다 무엇이었을까. 관계에 있어 약속을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나의 가치관도, 이 친구들과는 단지 오래된 관계라는 이유만으로 이해(수긍)해야 하는 영역이 되고 말았다. 이랬다 저랬다 약속을 밥 먹듯이 바꿔가는 무성의함에 지쳐 나의 입장을 아무리 설명해도 '우리 사이에'라는 익숙한 말들이 나의 입을 막았다. 반복되는 그들의 무례한 태도에도 '그러게 우리가 알아온 시간이 얼만데 고작 이 정도 가지고 뭘'이라는 말로 나를 가만히 다독였다.


가끔은 우리가 나눈 카톡 대화창을 혼자 조용히 들여다보기도 했다. 지난 대화의 스크롤을 천천히 올려가며 이 카톡방에서 나누는 대화의 질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의 대화는 대화일까, 그저 뱉어내는 말일까. 이 공간은 대화의 공간일까, 온갖 푸념과 욕을 쏟아내고 사라지는 공간일까. '나 오늘 이랬고 저랬잖아'라고, 받아들이는 상대의 입장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저 오늘 하루 힘들었던 자신의 일과만 다다다 토해내고 재빠르게 사라지는 이 공간의 역할에 대해 생각이 깊어지는 날이 많아졌다. 그래도 만나는 건 만나야 한다고, 평생 친구 아니냐고, 친구 좋다는 게 뭐냐고, '평생'이라는 단어를 운운하는 친구들의 모습에 나는 서서히 입을 닫았다. 만나서 나누는 대화의 절반 이상이 몇 십 번을 우려먹은 추억 팔이와 회사의 불만들, 결혼의 압박과 자신들이 만나는 사람들에 대한 온갖 푸념 등 무엇 하나 건설적인 대화가 오고 가지 않았다. 현재는커녕 과거로 퇴화하는 느낌마저 지울 수 없었다. 오랜만에 얼굴을 마주하고 만나면, 만남과 동시에 다소 촌스러운(어쩌면 고루한) 나의 옷 스타일을 지적하고, "얘는 대학 때나 지금이나 바뀐 게 하나도 없다"라며 비웃는 친구들의 모습에 할 말을 잃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좋은 옷과 신발, 구두, 가방, 각종 액세서리는 기본으로 가져야 한다고, 핸드폰은 역시 아이폰이라며 자신의 최신 기종을 자랑하듯 이것저것 품평을 늘어놓는 친구들의 모습에 더욱더 입을 닫았다. 나는 이 친구들과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어가고 있었던 것일까.

계속해서 곪아왔던 이 관계를 어떤 단어로 명료하게 표현할 수 있을까.


올해 초 읽었던 김혜진 작가의 <경청>이라는 책에서 주인공 해수는 길 고양이를 구출하는 과정에서 우연히 만난 세이라는 꼬마 아이와 친구가 된다. 또래 아이들과 어울리지 못해 지속적인 괴롭힘을 당하지만,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해 입을 꾹 닫고 있던 세이는 해수와 그녀의 오랜 친구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언제 싸웠는데요? 왜 싸웠어요?"

그녀는 싸움의 원인을 그저 놀이 중에 일어난 사소한 갈등, 그러니까 뭔가를 먼저 하겠다거나 많이 가지겠다거나, 성난 말을 주고받거나 서로를 밀치거나 하는 정도의 문제로 설명할 수 없다. 친구들 사이에서 수시로 생겨났다가 사라지는 시기와 질투, 경쟁과 오해 때문이라고 간단하게 요약할 수 없다. 그녀와 주현의 갈등은 그런 것이 아니다. 이유가 그처럼 단순했다면 갈등이 이처럼 오래 지속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세계관의 차이고 삶의 태도에 관한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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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친구들의 관계도 비슷했다. 하나의 사건 때문에 이 관계의 지속성을 고민한 것이 아니다. 오랫동안 생각했고 서서히 느껴왔다.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이 다르고, 서로의 가치관이 점점 벌어지고 있음에 대하여. 나는 소수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고 싶었지만 친구들은 그런 나의 가치관에 관심조차 없었다. 그저 지금 자신들이 누리고 있는 혜택을 어떻게 하면 더 쉽고 오랫동안 누릴 수 있을까, 남들보다 더 잘 나가기 위해서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인스타 감성에 어울릴만한 사진을 연신 찍어대며, 인생에 뭐 좀 재미있는 일 없나? 등 큰 사유 없이 얻을 수 있는 일차원적인 행복에 깊이 매몰되어 있었다. 나와는 다른 삶의 방식이었다.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걷기를 좋아하는 나의 목소리가 그 아이들의 귀에 닿을 리 없었다. 차가 있는데 왜 굳이 걸어야 하며, 책은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보면 얼마든지 이해하기 쉽도록 짧게 요약된 영상들이 많은데, 오랜 시간을 들여가며 읽을 필요가 무엇이냐고 나를 답답해했다. 나의 모든 행동 하나하나가 그 아이들에게는 그저 지루하고 우스꽝스러운 행위들에 불과했다. 내가 어떤 말을 한들, 우리 관계의 진정성을 말하는 나의 목소리는 친구들에게 닿지 않았다.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오히려 내 스스로만 더 우스워졌다. 뭘 그렇게까지 진지하냐는 답이 나의 말문을 막았다. 그렇게 혼자만의 싸움이 시작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관계를, 오래된 관계라는 이유만으로 끌고(끌려) 갈 것인가, 아니면 이제 그만 작별을 고할 것인가.


나는 후자를 택했다.

작별을 고했고, 나의 이 구구절절한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데 한계를 느껴 그나마 짧게 압축한(그럼에도 장문인) 글을 보냈고 돌아오는 친구들의 목소리에도 입을 닫았다. 조용히 동굴로 들어갔다. 그 카톡방을 차마 나가지는 않았지만, 조만간 그 방도 나올 생각이다. 이 일이 없었더라면, 원래 우리의 계획은 이번 여름휴가 기간에 맞춰 제주도를 가는 것이었다. 나는 제주도는커녕 그 아이들과 한 끼 식사를 나누는 자리조차 불편해 체할 것 같은 사람이 되고 말았다. 아쉬움이 많이 남을 거라 생각했던 나의 걱정은 우습게도 나의 지나친 기우에 불과했다. 아무런 감정이 남지 않았다. 오히려 후련했다. 왜 진작 이 관계를 끊어내지 않았나 싶을 정도로 말이다.


우리가 알아온 기간이 햇수로 14년이 되어간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20살, 격동의 시기를 함께 보냈다. 취업 준비를 이어가며 연거푸 탈락의 고배를 마실 때마다 서로가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었다. 시행착오가 많았던 나의 지난 연애사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것도 다 그 친구들이었다. 심지어 어릴 때는 당시 사귀었던 연인을 친구들에게 소개했던 적도 있었다(그것도 참 오래전 이야기다). 우리의 관계는 그만큼 깊고 특별했다. 하지만 이건 다 과거의 이야기다. 한참 지난 옛 추억이야기. 관계는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는 임경선 작가의 말처럼 우리는 서로를 당연한 관계로 여기기 시작했고 균열을 감지하지 못했다. 더 이상 나는 이 친구들과의 작별에 어떠한 죄책감도 책임감도 느끼지 않기로 했다.


기록 활동가인 홍승은 작가는 자신의 저서인 <관계의 말들>에서 오랜 시간 함께하다 보면 대화에도 패턴이 생긴다고 말한다.


더는 새로울 게 없고, 나는 너를 안다고 믿어 버리는 오만함도 무럭무럭 자란다. 그날 인터뷰를 지켜보면서 생각했다. 만약 내가 먼저 다른 질문을 던져서 익숙한 틀을 벗어난다면, 우리는 매일 처음처럼 관계를 맺을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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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말에 힘을 얻는다. 익숙한 패턴의 대화를 돌아볼 수 있는 사람들, 더 나은 관계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하는 사람들. 이제 나는 그런 사람들하고만 관계라는 것을 이어가고 싶다.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노력은 나와 마음이 맞을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환경에 나를 데려다 놓는 것이라고, 번지수 틀린 곳에서 자신을 억지로 끼워 맞추면서까지 인간관계를 맺을 필요는 없다고 말하는 임경선 작가의 말에도 힘을 얻는다.


그렇게 나는 그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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