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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Jun 14. 2023

나의 아지트가 될 수 있을까

홍대는 싫지만 책은 좋아

서울에서 내가 좋아하지 않는 동네를 순서대로 꼽아보자면 가장 첫 번째가 홍대입구, 두 번째는 명동, 세 번째가 강남이다. 이 세 동네의 공통점이 있다면 우선 거리에 사람이 너무 많다는 것, 길이 깨끗하지 않다는 것, 조용할 시간이 없고 말 거는 사람이 많다는 것 등이 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두 번째로 싫어하는 동네(명동)에 지금 나의 직장이 위치하고 있고, 세 번째로 싫어하는 동네(강남)에서는 매주 독서모임을 했었다(이제는 과거형). 덕분에 취향과는 별개로 꽤 빈번하게 두 곳을 방문한 셈이다. 그렇다면 홍대입구는?


홍대입구가 싫었던 가장 큰 이유는 꽤 오래전 기억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대 초반의 어느 크리스마스 이브. 벌써 이 단어만으로 그 동네의 번잡스러움과 화려함이 머릿속에 그려진다. 당시에 사귀었던 남자친구와 그 거리를 걷는데, 아니다. 이건 걷는다고 말할 수도 없는 지경이었다. 같은 날, 같은 시각 그 장소에 모 연예인이 등장하는 바람에 인파가 그쪽으로 몰려 한 발자국도 내디딜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이건 뭐 월드컵 거리 응원도 아니고. 그 거리에 멀거니 서서 나는 누구, 여긴 어디를 속으로 읊조리던 나의 기억 속 홍대의 모습은 그야말로 아수라장, 지긋지긋한 동네, 그 자체였다.


지금도 나는 여전히 홍대 근처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오늘 홍대를 다녀왔다. 심지어 이 글의 일부는 그 공간에서 썼다. 초고라고 해야 할까. <공상온도>라는 이름의 카페 겸 대안공간을 방문한 것이다. 독립출판물을 판매하고, 전시와 공연 그리고 아트마켓의 복합문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는 곳이다. 이 공간은 내가 진행했던 독서모임을 다양한 장소에서 열어보고자 호기롭게 장소를 물색하던 중 우연히 알게 된 공간 중 하나다. 문의했을 당시에도 사장님의 친절한 답변이 너무 감사했지만 차마 이곳에서 모임을 열지는 못했다.



안녕하세요, 먼저 문의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희 카페 특성상 다소 조용한 분위기의 공간으로 운영되다 보니 5인 이상의 단체는 되도록 지양하고 있는 편입니다.
(중략)
다만, 문의 주신 분들께서는 저희 특성을 알고 문의 주셨다 생각하여 몇 가지만 여쭤보고 해당 내용이 괜찮으시다면 예약 안내 도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사장님의 답변 중 유독 내 마음에 걸린 문장이 있었으니 바로 "문의 주신 분들께서는 저희 특성을 알고 문의 주셨다 생각하여"다. 아 나는 그 특성을 고려하지 못했다. 우리 모임원들의 목소리 데시벨을 고려했을 때, 우리의 등장 자체가 그 공간에 폐를 끼치는 것이라 여겨졌기 때문이다. 모임 하기에 아늑한 공간이라고만 생각했지 조용한 분위기의 공간이 어느 정도를 말하는지 감을 잡을 수 없어 죄송하다는 답장을 끝으로, 나만의 플레이스에 저장만 해두고 잊고 있었다. 모임 때문에 방문하는 거면 또 모를까 평소 좋아하지도 않는 동네를 굳이 혼자 발걸음 한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던 것이다. 그럼에도 오늘 내가 이 공간을 방문했던 건 얼마 전에 읽었던 <시한부 공상온도>라는 제목의 긴 글 때문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의 장기화로 인한 금전적 피해, 각종 자재 비용과 공과금의 급격한 상승 여파로 개인의 힘만으로는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상황까지 와버렸다는 사장님의 문장들. 올 연말까지는 버텨보려 힘써보고 있지만 현실을 이야기하자면 몇 달도 더 버티기 어려울 것 같다는 도움 요청의 글이었다. 자율 후원, 잦은 방문과 이용, 지식과 실행, 또는 협업 및 아이디어 제안, 지속적인 관심과 참여 등 개인과 단체가 할 수 있는 다양한 도움의 방식을 구구절절 장문으로 적었을 사장님의 마음이 내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이다. 물론 내가 드릴 수 있는 도움이라고 해봤자 이 카페를 자주 방문하는 것, 이곳에서 판매하는 책을 구입하는 것, 소액으로나마 기부를 하는 것 등이 있겠지만 그것만으로 한 공간이 다시 회생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의미 있는 일이 아닐까 생각하게 됐다. 연고도 없는 누군가를 응원하고자 하는 마음은 오랜 기간 기저에 깔려있던 나의 본질과도 같기에.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무언가를 열심히, 진심을 다해 하는 이들의 노력을 응원한다. 이것 또한 나의 본질과도 같다. 가심비라고 하는, 그 '심'을 건드린 것이다.


그래서 오늘 그 공간을 찾았고 즐거운 소비의 경험이었다 자부할 수 있다. 사실 내가 그동안 방문해 왔던 조용한 북카페들과는 조금 다른 느낌을 가진 공간이긴 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조용한데, 사실 막 그렇게 조용하다고 말하기도 애매하다. '이래서 홍대인가?' 싶은 느낌이 있다. 한쪽 벽면에서는 빔프로젝트로 영상(흑백영화인 것 같은데 제목을 모르겠다)이 나오고 있고, 테이블과 의자, 책장과 책 등의 각종 인테리어 소품들까지 무엇 하나 질서가 없다. 약간 빈티지 감성이라고 해야 하나. 여하튼 내가 평소 중요시 생각하는 질서 정연함과는 거리가 먼 공간이긴 하다. 여러 사람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이것저것 작업을 하고 있는데, 전체적으로 다 뒤섞여있는 느낌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생각하는 조용함과도 거리가 있다. 아니면 그동안 내가 너무 조용한 공간만 찾아다녔는지도. 이런 조용함에 대한 다양성이 부족했나 싶기도 하고.


그럼에도 이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은 꽤 만족스러웠다. 버스를 두 번이나 환승하고, 홍대입구역 근처에서 도를 아냐고 물어보시는 분들을 수없이(심지어 외국인도) 마주치고, 걸어오는 내내 수많은 인파와 어깨를 부딪치며 길치인 주제에 잘도 골목골목을 헤매다 이곳에 도착했지만 그럼에도 다 좋았다. 조금이라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는 마음으로 이 공간을 찾았다는 게 나에게는 충분히 가치 있는 소비였을 테니까. 비록 사장님은 나의 이런 마음을 절대 모르시겠지만 말이다. 나는 보통 책을 구입해서 읽기보다는 대출해서 읽는 편이지만(도서관 우수회원입니다), 이 공간에서는 다양한 독립출판물도 판매한다고 하니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나면 꼭 사야겠다 다짐하고 서가를 둘러봤다. 안타깝게도 나의 마음을 뒤흔들 정도의 책을 발견하지 못해 이것저것 들춰보기만 하다 발걸음을 돌렸지만 또 모르지. 다음에 방문했을 때는 나의 마음에 꼭 드는 책을 만날 수 있을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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