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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Aug 24. 2023

한 달 쉬고 오겠습니다.

아 브런치 말고, 회사요. 회사.

휴식이라고 하면 많은 이들이 자연(自然)을 가장 먼저 떠올린다. 휴양림을 산책하거나 등산하는 등 맑은 공기를 마시면서 자연을 접해야 휴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물론 자연을 통해 휴식을 얻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자연에 감흥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산이나 바다가 휴식처가 되지 못한다. 온종일 집에서 낮잠을 자는 것이 이들에게는 더 좋은 휴식이 될 수 있다. 산이나 바닷가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과 방구석에서 아무것도 안 하는 것이 다를 바가 없는 이들이 굳이 고생스럽게 산이나 바다를 찾아가 휴식할 필요는 없는 것이다.
(중략)
휴식에는 고정관념이 없다. 사람마다 식성이 다르듯 휴식하는 방법은 제각각이다. 남의 눈치 보지 말고, 눈치 주지도 말자. 휴식은 그야말로 휴식이어야 한다.


관련기사 : 진정한 휴식과 재충전 '휴식에 대한 편견부터 깨라'



어제부터 긴 휴가가 시작됐다. 내 인생 처음으로 맞이하는 한 달 동안의 장기 휴가다. 내가 근무하는 회사는 5년을 근무하면 한 달의 휴가가 주어진다. 10년을 근무하면 두 달, 15년을 근무하면 세 달... 이렇게 5년 단위로 근속 연수에 따라 장기 휴가가 주어지는 안식월 제도가 있다. 나는 처음 이곳으로 이직할 때만 해도 내가 이곳을 5년이나 다닐 수 있을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전 직장에서 워낙 빌런 같은 이들을 경험하면서 인간에 대한 깊은 환멸을 여러 차례 경험한 터라 사람에 대한 기대치가 워낙 낮아져있기도 했고, 이쪽(비영리 섹터) 분야의 위선적인 행태를 고발하고 싶은 마음이 한참 솟구치던 시기이기도 했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이라고 해서 꼭 좋은 사람들은 아니라는 나름의 철칙도 생겼고, 결국 사람 사는 곳은 다 거기서 거기일 뿐이라는 염세적인 모습까지 잔뜩 두른 채로 이곳에 이직하게 된 것이다.


함께 입사한 동기는 총 18명이었지만, 이제 나를 제외한 단 한 명만이 이곳에 나와 함께 몸담고 있다. 나와 직급이 달라진 그는 장기 휴가는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바쁜 일정을 소화해가고 있었지만 나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오랜 슬로건처럼 나 또한 간절하게 쉼이 필요했다. 이곳이 첫 직장은 아니라서 몇 번의 이직을 경험하기도 했지만, 25살부터 사회생활을 시작했던 나였기에 지금의 나이로 치자면 거진 10년가량은 쉼 없이 달려온 것이다. 사실 이직의 공백을 제외하고 급여를 받으면서 온전히 한 달을 쉴 수 있다는 건 아직 실감이 잘 나지 않는 먼 나라 이야기 같기도 하다. 업무 특성상 여름휴가조차 5일을 붙이거나 주말까지 연결해 써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충분히 그럴만했다.


휴가 날짜가 다가올수록 내가 해왔던 업무들을 목록으로 차근차근 정리하면서 한 달 동안 나의 일을 도맡아줄 팀원들에게 전달할 인수인계서를 만들었다. 한 번에 다 만들지 않고 매일 조금씩 리스트를 추가하고 정리하면서 혹여나 빠트린 게 없는지를 계속 체크했다. 특히 휴가를 한 달 앞두고 있었을 무렵에는 마치 퇴사하는 기분마저 들어 일이 손에 잘 잡히지 않기도 했다. 처음에는 가족들과 캐나다로 여행을 가기로 했었다. 하지만 오빠의 결혼 준비 일정으로 여행이 무산되면서 자연스레 나만의 일정을 만들기 시작했다. 오롯이 나를 위한 쉼의 일정 말이다. 위 기사에 담긴 문장처럼 사람마다 식성이 다르듯 휴식하는 방법도 제각각일 것이다. 그럼에도 유독 긴 휴가를 앞두고 있다 보니 뭔가 그럴싸한 계획이 있어야만 할 것 같은 강박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 기간 동안 뭘 할 거냐는 주변인들의 질문에 일일이 답하는 과정도 꽤나 피곤함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여행을 가려고요"라고 기계적으로 읊어대다가 그 여행의 행선지가 어디인지, 얼마나 갈 것인지를 꼬치꼬치 물어대는 사람들을 상대하다 보니 이내 "그냥 쉬려고요", "하루 종일 책만 읽으려고요" 등 장기 휴가라는 거창한 타이틀에 걸맞지 않은 다소 시시한 나의 답변에 흥미를 잃은 듯한 사람들의 모습도 보였다. 그건 정답이 아니라는 듯 허탈하게 발걸음을 옮기는 그들의 뒷모습을 담담하게 바라봤다. 쉬는 것조차 뭔가 그럴듯하게 쉬어야만 할 것 같은 이 알 수 없는 기분은 대체 무엇일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나의 휴가는 좀 더 나답게 즐겨보도록 하자고. 유일무이한 나만의 방식으로, 남들이 보기에 보잘 것 없어 보일지라도, 그저 내가 좋으면 그만인 것들로 가득, 아주 가득 채운 시간들을 보내보자고 다짐했다.


나는 우선 책, 글쓰기와 관련된 것들을 해보고 싶었다. 정말 다양한 분야로 말이다. 체력이 좋은 편이 아니라 평일 저녁에는 어느 누구와도 약속을 잡지 않는 나의 오랜 습관부터 바꿔보고 싶어졌다. 적어도 이 기간 동안만큼은 괜찮을 것 같았다. 다음 날 출근을 위해 일찍 일어나야 한다는 압박이 사라졌을뿐더러 책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와 프로젝트 등은 대체로 평일 밤에 열리곤 했으니까. 이제는 그런 프로그램도 부담 없이 참여할 수 있을 것 같았고, 늦은 밤 문화(방탕한 거 말고요)를 조금은 즐겨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도 스멀스멀 올라오기 시작했다. 한 주에 한 번씩 내가 좋아하는 지방의 소도시들을 길게는 2박 3일, 짧게는 1박 2일 동안 머무르기 위한 북스테이도 하나둘 알아보며 예약하기 시작했다. 대체로 인적이 드물고 조용하며 청결한 곳들이었다. 공간의 감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나에게 매우 필수적인 요소였고, 그곳을 운영하시는 사장님들 또한 나와 비슷한 유형(내향인)의 사람들이었다.


그렇게 하나하나 내가 하고 싶은 것과 가고 싶은 곳의 목록들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만들어보고 싶은 것도 있었고 도전해 보고 싶은 분야도 생겼다. 리스트에 이것저것 추가하다 보니 한 달이라는 기간에 이 많은 게 다 가능할까 싶어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아니, 쉰다더니 이렇게 또 한도 끝도 없이 늘어나는 리스트에 역시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자각하며 그냥 인정하기 시작했다. 휴식을 빙자해 더 바쁘게 살아갈 나의 모습을 말이다. 그렇게 휴가의 첫날인 어제는 새로운 향수 공방을 찾아 오랜만에 향수를 한 병 만들었고(2주 동안 얼마나 더 숙성된 향이 나올지 궁금하다), 오늘은 내가 종종 즐겨갔던 한옥 도서관에서 오랜만에 봉사활동을 하고 왔다. 내일은 좋아하는 독립서점에서 다음 주에 가게 될 강화도 여행 계획을 마저 정리하고, 창작물을 구상하고, 모임을 열기 위한 도안을 만들 예정이다. 그다음 날은 내가 그토록 뵙고 싶었던 장강명 작가님의 북토크를 운 좋게 갈 수 있게 됐다(갑자기 결원이 생긴 것!). 심지어 그 북토크를 진행하시는 분이 브런치 글에서도 종종 소개했고, 지금도 나와 서로를 구독하고 있는 '나묭'님이라는 사실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두 작가님의 담화라니! 너무나 설레는 일이다.


그 뒤의 일정들도 가득하다. 이번에 이것저것 검색하면서 알게 된 사실인데, 생각보다 도서관에서 하는 좋은 프로그램들이 많다. 특히 책과 관련된 다양한 행사들은 대부분이 무료인데다 양질의 콘텐츠에 섭외력도 뛰어나다. 배울 수 있는 프로그램 또한 마찬가지다. 그것 외에도 매주 새로운 도시를 여행할 예정이고, 읽고 싶었던 책들을 차례차례 독파할 예정이다. 독서노트를 제대로 써볼까도 진지하게 고민 중이다. 어제만 해도 휴가라는 게 제대로 실감나지 않았는데, 막상 시간이 주어지니 하고 싶은 것들이 머릿속에서 계속 샘솟는 중이다. 흔히 말하는 트렌디함이 부족한 나만의 계획들일지 모른다. 혹자는 이럴 때 해외여행을 다녀와야지 언제 다녀오겠냐고 훈수를 두며 간섭할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것들의 리스트를 보며 도대체 그걸 왜 하냐고 되물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내 대답은 여전히 한 가지다. 좋으니까. 그냥 너무 좋아서. 그리고 이런 소소한 것들을 통해 깊은 행복을 찾는 게 나라서. 누군가의 글을 여러 번 읽고 댓글 하나 다는 것조차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사람, 그게 바로 나라서.


1인 출판사 임시제본소의 대표이자 출간하는 모든 책을 혼자 쓰고 만드는 강민선 작가의 <어크로스 더 리버스>에서 그녀는 총 23개의 한강 다리를 걸으며 그때 떠올린 여러 기억들과 감정들을 글로 담아낸다. 눈물이 많은 그녀는 눈물을 참기 위해, 혹은 실컷 울기 위해 선택한 것이 '걷기'였고, 그렇게 정한 목적지가 바로 '한강 다리'였다.



다리를 건너는 이유가 뭐냐는 P의 질문에 그러게, 하고 말았는데 하루에 잠실철교와 올림픽대교 광진교를 연달아 걸으면서 다시 한번 알게 되었다. 그냥 좋은데 어떡해. 자꾸 걷고 싶고, 해가 지지 않거나 내가 지치지만 않는다면 계속 걸을 수 있겠는걸. 집에 돌아오면 다음 날 걸을 생각에 가슴이 막 뛰는 걸 또 어떡해. 꼭 누굴 만나러 가는 거 같애. 그냥 다리를 보는 것뿐인데. 그 다리를 걷는 것뿐인데.



나에게도 이번 휴가가 그런 마음이길 바란다. 단순히 내가 좋아서 하는 것들로 가득 채운 시간들이 되기를 말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고, 아무거나 해도 괜찮고, 그냥 내가 하고 싶은 걸 마음껏 도전하고 부딪치고 누릴 수 있다는 그 자유로움이 너무 좋다. 그럼에도 회사로 다시 복귀하기 전날 밤을 생각하면 가슴 한구석이 벌써부터 꽉 막히는 기분이 들지만! 미리부터 걱정하지 말자. 5년 동안 잘 달렸고 매너리즘에 빠질 때쯤 적절하게 쉼을 얻은 것이다. 그러니 아낌없이 가득 충전하자.


근데 오늘 기상 시간이 4시 전이었다. 잠자는 시간이 왜 이렇게 아까운지 모르겠다(충전한다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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