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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Aug 20. 2023

저는 그냥 복잡하게 진지한 사람 할게요

이게 나야

책을 만들고 나면 언제나 그 책을 소개할 단 한 줄의 문장을 생각했다. 목소리도 작고 자주 더듬고 뭔가를 설명하려면 단어와 단어 사이에 한없이 긴 공백이 필요한 나를 대신해 책 스스로 자기 자신을 설명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다. 책 혼자서도 이 세상을 살아가게 해주고 싶었고, 나보다 더 잘 살아가게 해주고 싶었다. 이 책은 무엇에 관한 책입니다.

짧고 분명하게! 이 책은 한강 다리에 관한 것입니다! 이 책은 한강 다리를 건넌 한사람에 관한 책입니다! 이 책은 한강 다리를 건넌 한 사람의 혼란과 고난 극복기입니다! 아니, 이 책은 인간과 다리의 팬로맨틱 러브스토리입니다!(뭐?) 라고 말하고 싶은데, 사실은 어떻게도 설명할 수 없는 애매하고 모호한 나의 개인적인 이야기이다. 늘 그랬듯이.

<어크로스 더 리버스> 강민선



강민선 작가의 <어크로스 더 리버스>라는 책을 읽으며 지금껏 아무 생각 없이 건넜던 한강의 다리들이 새롭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어젯밤 노들서가를 다녀오면서 내가 건넜던 다리는 한강대교였고, 오늘 지나갈 다리도 한강대교다.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나는 무작정 집을 뛰쳐나와 정처 없이 여기저기 걸어 다니곤 했는데, 정작 다리를 건널 때는 그 마음이 어떤 마음인지 몰랐다. 독립하기 전에 부모님과 노량진에서 함께 살 때 내가 자주 걷던 다리는 여전히 한강대교였다. 이제는 사라졌지만 자살방지 예방문구가 걸어가는 길마다 쓰여 있어 그 문구를 읽으며 앞으로 나아가는 것만으로도 복잡했던 마음이 차분히 내려앉는 느낌이었다. 그랬던 내게 또다시 복잡한 시기가 찾아온 것일까.


아니, 다시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다. 잘 모르는 것 같다. 정확히는 내 머리가 지금 복잡한 것인지 아닌지조차 모를 때인 것 같다. 생각이 많은 것은 늘 그래왔던 터라 익숙한데, 고민이 있어서 그런 것인지 그냥 생각이 많은 것인지 가끔 구분이 어렵다. 고민이 많은 것이 문제라면 그건 해결하면 되는 거니까.


'몸이 무거워지는 것이 고민이 많은 것과도 연결되어 있다'라는 문장을 오래 들여다봤다.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해서. 유독 걱정과 고민이 많던 시기라 몸이 천근만근 무거울 때도 있었지만(대체로 이때는 쉬어도 쉬는 것 같지가 않다), 무겁기보다는 오히려 생각이 너무 또렷해서 힘들었던 때도 있었다. 반면에 고민은 없는데, 회사일이 너무 많은 날에는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 침대에 풀썩 쓰러져 잠들었다. 컨디션이 좋은 날은 이유 없이 기분이 좋기도 했고, 컨디션이 좋지 않은 날은 아무런 이유도 없이 기분이 툭 다운되기도 했다. 그야말로 들쑥날쑥이다.


그럼에도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있다. 걱정이 많으면 몸이 아파버린다는 것. 적어도 나는 그랬다. 대체로 가장 약한 곳을 공격당하는데, 머리가 어지럽거나 소화가 되지 않는 게 대표적인 두 가지 증상이다. 정말 심할 때는 머리가 아프기도 하는데, 이건 정말 드문 경우고, 스트레스가 심해질 때면 대체로 속이 울렁거려 식욕이 뚝 떨어진다. 입맛이 사라지면 먹는 양도 자연스레 줄어 몸에 기운이 더 없어지고 활력도 떨어진다. 그야말로 악순환의 굴레다.


'몸과 마음이 멀어지면, 몸도 마음도 무거워집니다"라는 문장에서도 한동안 가만히 머물러 있었다. 단번에 이해하기 어려운 문장이라 생각했다. 머리로 알아도 직접 실천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인데, 이 문장은 머리로도 잘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몸과 마음이 떨어져 있는 상태란 구체적으로 어떤 상태를 말하는 것일까. 영혼이 분리되어 있는 듯한 느낌을 말하는 것일까. 이를테면 내가 불안에 지나치게 휩싸였을 때 허공을 걷는 듯한 그 느낌처럼 말이다. 내 몸과 마음은 지금 어디쯤에 놓여있을까. 현재에 제대로 집중하며 살아가고 있는 것이 맞는 것일까.


어제 나가는 길에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곁에 있다는 것은 참 따뜻한 일이겠지만 그렇다고 매 순간 그 감각을 인지하면서 살아갈 수는 없다는 생각. 그러니까 때때로 찾아오는 나의 이 공허함을 채워줄 수 있는 건 나 자신밖에 없다는 사실이랄까. 물론 누군가 곁에 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 피어나는 안온함이 있다. 건강해지는 기분, 든든해지는 기분말이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나 혼자 오롯이 견뎌내야만 하는 일상의 순간들이 있고, 가끔은 그 일상이 벅차게 느껴져 주저앉고 싶을 때가 있다. 한없이 기대고 싶은 기분. 벌려놓은 일은 많은데 그 일에서 도망치고 싶은 기분. 그럼에도 나는 익숙한 발걸음을 익숙한 장소로 옮긴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요즘 날씨가 너무 들쑥날쑥해서 그렇다고 핑계 대고 싶다. 지금 내 기분이 이렇게 멜랑꼴리한 것은 단지 날씨에 졌기 때문이라고. 다음 주부터 다시 시작될 비 때문에, 그냥 비 내리는 날과 그 언저리의 날들은 다 그런 거니까라고 중얼거려 본다(정작 아직은 비가 내리지 않고 있지만).


나는 머리가 복잡할 때마다 그 복잡함을 굳이 해소하려고 하지는 않는 것 같다. 내가 생각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은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고, 머릿속이 시끄러운 것도 바꿀 수 없는 기질이라면 그 물길을 다른 곳으로 틀어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다. 이를테면 어떤 고민 한 가지를 붙잡고 계속 파고들고 있는 나를 발견했을 때, 그 고민이 너무 고통스럽다면 그 고민을 멈추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고민을 넣어준다. 일종의 환기라면 환기랄까. 근데 고민은 여전히 고민이 맞지. 그저 다른 고민일 뿐?


대체로 나의 삶은 복잡하다. 단순한 게 좋다고 말하지만 정작 내 삶은 복잡하게 흘러간다. 그리고 복잡하게 행복하다. 글을 쓸 때도 오늘처럼 이렇게 말꼬리를 잡아가면서 쭉쭉 늘여 쓰고 싶을 때가 있는데, 올해 읽었던 이승우 작가의 <사랑의 생애>라는 책이 딱 그랬다. 굉장히 흥미롭게 읽은 책 중 하나다. 작가의 글은 대체로 집요하다. 사랑을 단순한 감정으로 보지 않고, 사랑하는 사람은 사랑의 숙주라고 표현한다. 사랑을 하나의 생명체로 본다고 해야 할까. 언뜻 보면 평범한 남녀의 사랑이야기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사랑이라는 한 편의 길고도 집요한 보고서를 읽어가는 기분이다. 어떤 문장은 단번에 이해가 되지 않아 다시 읽고, 또 읽다가 혼자 '이건 무슨 궤변이야'를 중얼거리면서도 계속 읽을 수밖에 없는 묘한 매력이 있다. 이 책을 읽을 당시 이승우 작가의 다른 작품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다른 작품들도 이 모양(?)인지 내 눈으로 확인해 봐야겠다고 다짐했었지. 근데 사실 나는 이런 집요한 글을 좋아한다. 진짜 제대로 고민해 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집요함 같아서 말이다.


<사랑의 생애>를 완독하고 한동안 이승우 작가를 잊고 있었는데, 오늘 이 글을 쓰면서 그가 떠올랐다. 그의 집요한 말장난도. 그때의 다짐처럼 그가 쓴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어졌다. 지금 읽고 있는 책(아주 희미한 빛으로도와 디스옥티비아)과 읽고 싶은 책(아버지의 해방일지, 사랑하는 습관, 동물권력, 그리고...)은 여전히 많지만, 책 목록에 책들을 계속해서 넣었을 때 느껴지는 심리적 안정과 쾌감이 있다. 읽을거리가 많은 삶은 나에게 행복이다. 중독된 삶을 경계하는 편이지만 활자중독만큼은 허용해주고 싶다.


더 많이 읽고, 적당히 쓸 수 있는 내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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