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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Aug 30. 2023

12,000일 동안 사느라 고생 많았다

2023년 8월 29일. 이날은요. 1990년 10월 22일에 태어난 당신이 12,000일 동안 생을 이어와야만 맞이할 수 있는 하루랍니다. 당신이 곧 맞을 12,000번째 하루를 진심으로 축하해요. 이렇게나 긴 시간 고생 많았고, 많은 것들을 이겨내고 여기까지 왔을 당신을 생각하면 대견하고 자랑스러워요.



그러니까 바로 오늘이 내가 이 세상에 살아 숨 쉬게 된 12,000일이 되는 날이라는 거다. 처음 알았다. 매년 반복되는 생일조차 나이를 먹을수록 무뎌져가는 나에게 또 하나의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준 사람이 곁에 있다는 사실이 감사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나의 생일과 우리의 기념일도 물론 중요하지만, 그가 아닌 다른 누군가와도 이미 여러 번 거쳐왔을 기념일보다는 일생에 한 번뿐인 오늘을 기념하며 나에게 특별한 하루를 선물로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얼마 전에 다녀왔던 사적인서점에서 내가 들었다 놨다를 수없이 고민했던 책을 눈여겨본 그는 12,000일을 살아낸 나를 축하하며 그 책을 선물로 건넸다. 특별한 하루와 내가 읽고 싶었던 책, 평일에 만나야만 했던 이유가 담긴 편지 한 통이 예고도 없이 내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나의 생일을 알게 된 순간 자연스레 내가 살아온 나날을 카운트해 봤다는 그의 문장에 말문이 막혔다. 지독한 낭만주의자인 나에게 그가 건넨 모든 것들은 말로 다 표현하기 어려운 무언가가 툭하고 건드려진 것이다.





이제는 내가 태어난 지 12,000일을 하고도 하루가 지났다. 나는 12,000일을 맞이했던 날 강화도에 갔다. 바로 어제 말이다. 긴 장기 휴가를 맞이해 홀로 떠나는 첫 여행지로 강화도를 택한 것이다. 태어나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동네를 첫 여행지로 정했던 건 단순한 이유였다. 가보고 싶은 북스테이가 위치한 곳이기 때문이다. 연고도 없는 동네로 무작정 떠난다는 게 낯설기도 했지만 설레는 마음이 더 컸던 건 사실이다. 책방시점이라는 북스테이였는데, 서점을 겸하고 있어 그곳에 머무르는 2박 3일 동안 서점에서 실제로 판매하는 책들도 자유롭게 24시간 동안 읽을 수 있다.


물론 여행이 순탄하기만 했던 건 아니다. 책방시점으로 가는 첫날 버스에서 졸다가 정류장을 지나쳤는데, 눈을 떠보니 논과 밭이 가득한 그야말로 생시골이었다. 놀란 마음에 하차 버튼을 누르고 가까운 정류장에 내려 반대편 정류장에서 다시 돌아가면 되겠다는 생각은 나의 오산이었다. 이 동네는 서울처럼 단순히 반대쪽 정거장에서 탄다고 반대 경로로 돌아가는 노선이 아니었다. 심지어 배차간격도 너무 길었고, 내가 버스를 탄 시간이 늦은 저녁이라 이미 운행이 종료된 버스도 있었다. 불안한 마음에 근처 여러 정류장을 찾고 빠르게 경로를 재탐색했다. 정말 다행히도 가까운 곳에 다시 돌아갈 수 있는 버스가 15분 후면 도착한다는 걸 알고 다급하게 그 정류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평소 자연 속에 살고 싶다고 그렇게 노래를 부르더니 막상 인적이 없는 시골 한복판에 툭하고 버려진 나는 배터리가 얼마 남지 않은 핸드폰을 막연하게 내려다보며 이 상황을 최대한 긍정적으로 생각하려다 갑자기 웃음이 터졌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버스에 승객은 나 하나뿐이었다. 기사님은 단 한 명의 손님인 나를 위해 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버스를 출발시키지 않으셨다(내가 넘어질까 봐).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출발하셨고 그 버스는 내가 타고 있는 내내 단 한 명의 손님도 없이 목적지까지 무사히 나를 데려다주었다. 버스에서 내려 북스테이까지 찾아가는 길도 길치인 내게는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하필 비까지 내리고 있어 길이 진흙탕이 돼버리긴 했지만 비포장도로 시골길이 주는 자연스러움이 그리 싫지만은 않았다. 한참을 걸어가다 웅성거리는 사람들 덕분에 하늘을 예쁘게 수놓은 무지개도 발견할 수 있었고 사진으로 담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짓기도 했다. 모든 게 느리게 흘러가는 것만 같은 이 동네의 시간이 참으로 평화롭고 좋았다. 겨우 도착한 숙소는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조용하고 아늑한 공간이었다. 나를 계속 기다리고 계셨던 사장님은 반가운 얼굴로 나를 맞이해주셨다. 실내 슬리퍼로 갈아 신고 사장님과 함께 숙소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며 귀여운 고양이 가족도 소개받았다.


낯선 곳에서 쉬이 잠들지 못하는 나의 예민함이 발동할까 우려했지만 웬걸. 오랜만에 숙면을 취했다. 꿈까지 꿔가면서 말이다. 이른 아침에 일어나 1층 서점에 들러 읽고 싶은 책을 한 권 챙겨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내가 묵은 곳은 이 숙소의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다락방인데, 서울로 돌아가면 내 방도 이런 느낌으로 다시 꾸미고 싶을 만큼 예쁘고 아기자기했다. 서점에서 챙겨온 책을 탁자에 가만히 올려두고 이 글을 쓰고 있다. 밖에는 풀벌레 소리와 새소리, 바람 소리 등 각종 자연의 소리들만 간간이 들려온다. 정말 평화롭고 조용한 동네다...라고 마무리 지으려던 찰나 갑자기 음악이 흘러나온다. 처음에는 서점에서 트는 음악인가 싶어 가만히 귀를 기울여봤는데, 갑자기 음악이 툭하고 끊기더니 방송이 흘러나왔다. 이 동네의 이장님이신 것 같았는데, 새벽 5시 30분에 집을 나간 어떤 어르신의 행방이 연하다는 방송이었다. 그분을 보신 분이 계시다면 가까운 파출소나 이장인 자신에게 꼭 알려달라는 내용을 세 번가량 반복하시고는 방송을 마치셨다. 안타까운 마음이 드는 한편 무사히 집으로 귀가하셨으면 하는 바람도 담아본다.


그렇게 나와 강화도의 2일차가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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