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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Sep 01. 2023

하루에 3만 보는 걸어줘야 여행이지

비록 다리는 으스러져도

한나 아렌트에 따르면, 외로움 없이는 묵상하는 삶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사유 자체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나 아렌트가 그녀의 책 <정신의 삶>에서 썼듯이, 활동적인 삶과 세상으로부터 능동적으로 물러나야 비로소 그 공간에서 '의미-찾기'와 '자기 자신 생각하기'가 가능해지고, '보이지 않는 존재'와 대화할 수 있는 여지도 생긴다. 에마 뉘엘 레비나스 또한 '실존적인 외로움' 속에서만 자아의 한계를 깰 수 있는 가능성이 생긴다고 했다. 이 철학자는 혼자 사는 실존적 경험을 통해서만 우리는 비로소 타인의 '얼굴'을 직접 대면할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 경험을 통해 우리는 타인이 나름의 인간적 약점과 차이를 가진 존재라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은 결코 완벽하게 파악할 수 없는 존재라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고 했다. 고독을 경험하지 못한 사람은 자아의 한계에서 벗어날 수 없고, 타인들과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도 없다.

<홀로> 다니엘 슈라이버



강화도에서의 둘째 날, 정말 징그럽게도 걸어 다녔다. 가보고 싶은 절과 성당, 해변가가 있었는데 이동경로를 검색해 봤더니 두 시간이 넘게 나오길래 오늘은 대중교통으로 이동해야겠다고 (처음에는 그렇게) 다짐했었다. 사장님이 차려주신 정성스러운 조식을 먹고, 배가 든든해진 상태로 버스정류장을 찾았다. 비 온 뒤라 그런지 날씨가 선선했다. 연일 습한 날씨가 이어져 답답했던 나의 걸음이 고삐가 풀린 것처럼 한 걸음, 한 걸음 땅을 밟아나가기 시작했고 이내 탄력이 붙고 말았다. 그렇게 그 모든 여정이 시작되어 버린 것이다. 그 긴 경로를 발로 걷기로 마음먹은 것이.


이번 여행의 목적은 단순했다. 큰 틀은 있었지만 그 틀에 벗어나도 조급해하지 말고 발길 닿는 대로 걸어보기. 길을 걷다 우연히 발견한 꽃이 너무 예뻐 가만히 들여다보기도 하고, 절에 올라갔다가 불공드리는 소리가 편안하게 느껴져 숲 속 벤치에 앉아 자연의 바람을 벗 삼아 책을 읽기도 했다. 이 글의 도입부에 인용해 두었던 다니엘 슈라이버의 <홀로>라는 책을 말이다. 이 책은 그동안 여러 매체에서 수없이 다뤘던 '혼자'라는 키워드를 조금 더 다층적으로 풀어낸다. 혼자 사는 삶의 안락함과 자유로움만을 주장하는 각종 미디어의 허점을 냉철하게 파고든 느낌이랄까. 외로움과 고독, 사랑과 우정 등 진실된 관계 맺기란 과연 무엇인지 오랫동안 사유한 저자의 통찰력 있는 글을 읽으며 동의하는 지점도 여럿 있었다. 그는 자신의 부족함을 솔직하게 인정했고, 무엇을 가장 두려워하는지도 용기 있게 고백했다. 자칫 혼자의 삶을 찬양하는 이들의 뒤통수를 강타할 수 있는 주장들도 있었지만, 인정할 건 인정하자는 그의 단호함에 나 또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때마침 혼자 여행을 온 나에게 시의적절한 책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했다.


벤치에 앉아 한참 동안 책을 읽다 옷을 털고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후가 되자 화창했던 하늘은 다시 먹구름이 끼더니 빗방울이 한두 방울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는 가방에 챙겨 온 우산을 펼치고 버스정류장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가다 이내 자연스럽게 버스정류장을 지나쳐 걷기 시작했다. 산책의 연장선이라 생각하며 무작정 걷는데, 세상에 이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말 그대로 자연의 향취를 온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샌들을 신고 있어 발과 다리에 풀이 스치면서 쓸리기도, 벌레에 물리기도, 물집이 잡히기도 했지만 그 자연스러운 상황들이 그냥 다 좋았다. 서울에서 걸을 때와는 또 다른 느낌의 산책이었다. 아니, 감히 비할 바가 못 됐다. 걷는 사이에 비는 그쳤고 살랑살랑 불어오는 바람과 촉촉한 비 비린내, 습하지 않고 적당히 선선한 날씨 등 모든 것이 내가 계속 걸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만들어주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8km가 넘는 거리를 걷고 또 걸었다. 사람이 걸을 수 없는 길은 차도 끝으로 몸을 붙이며 걸었고 쌩쌩 달리는 차에 행여나 부딪치지 않을까 조마조마한 마음이 들면서도 걷기를 멈출 수 없었다. 반대 차선에서 오는 차량의 운전자들은 나의 여정을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곤 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계속 걸었다. 내가 걷는 건지 다리가 나를 걷게 해주는 건지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쯤 저 멀리 동막해변이 보였다. 선착장을 지나 해변가에 이르러서야 '바다다!'라는 생각에 속이 탁 트이는 기분이었다. 여름의 끝자락에 만난 바다의 모습은 그야말로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나는 해변가의 흙을 밟다가 근처 계단에 자리를 잡았다. 저 멀리 보이는 바다와 부드럽게 반짝이는 윤슬은 마치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환상에 빠질 정도로 아름다웠다. 평화롭게 바닷가를 거니는 사람들의 모습도, 갈매기를 졸졸 쫓아다니는 어린아이의 모습도 다 좋았다.


돌아가는 길에는 버스를 탔다. 배차간격이 길어서 두 시간을 기다려야 했지만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어차피 기다리는 김에 바다나 실컷 구경하고 이 좋은 풍경에 앉아 책도 마음껏 읽자고 말이다. 해가 서서히 저물어가는 바닷가의 모습은 아름답다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경이로웠다. 원래도 노을을 좋아하는 나에게 이건 정말 반칙이지 싶었다. '이걸 보려고 버스가 늦게 왔나 보다'라고 생각할 정도로, 이른 아침부터 해가 저무는 그 시간까지 자연이라는 큰 선물을 받은 기분이었다. 그리고 내 옆에는 책이 있었다. <홀로>라는 책을 해변가에서 마저 다 읽고 버스 시간에 맞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강화도에 와서 느낀 신기한 점 중 하나는 버스 기사님이 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기다려 주신다는 것이다. 시내버스를 탈 때마다 내가 가장 선호하는 자리가 있는데, 그 자리는 운전석과 꽤 멀어서 서울에서 버스를 탈 때면 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에 이미 쌩하고 출발하는 버스의 움직임에 휘청일 때가 많았다. 하지만 강화도의 버스기사님은 달랐다. 내가 자리에 앉을 때까지 가만히 기다리셨다가 앉자마자 라이더로 돌변(?) 하시곤 하셨다. 너무나 충만한 하루였다고 가만히 혼자 읊조리며 빠르게 스쳐가는 바깥 풍경을 마저 구경했다.


강화도에서 보낸 2박 3일의 여행은 자연 안에 나를 온전히 넣어준 시간이었다. 첫날은 숙소로 가는 길에 시골에 버려지기도 하고, 배차간격에 살짝(과연 살짝일까) 소름이 돋기도 했지만 이틀 동안 그런 상황에 차츰 익숙해지면서 느림의 미학을 경험할 수 있음에 감사한 마음이 올라오기도 했다. 마지막 날은 이른 새벽 숙소를 나섰다. 내가 떠났다는 걸 모르시고 조식을 준비하실지도 모를 사장님이 떠올라 일이 있어 먼저 간다는, 감사했다는 장문의 메시지도 살짝 남겨 두었다. 숙소에 살고 있는 고양이 '고요'가 새벽부터 분주하게 움직이는 나를 졸졸 따라다니는 바람에 심장이 녹아내려 버스를 두 대나 놓치긴 했지만, 고양이가 이렇게 귀여운 생명체라는 걸 새삼 또 느꼈다(나만 없어, 고양이). 여행은 나를 한결 더 차분하고 평온하게 만들어줬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온몸이 충만할 정도로 자연의 향취를 가득 느끼고 나니 서울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그리 무겁지만은 않았다. 비로소 나의 집으로 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 주에 있을 춘천여행이 벌써부터 기대되기 시작한다. 홀로 떠나는 나의 이 짧은 여행들이 쌓이고 쌓이다 보면 조금 더 건강한 내가 될 것만 같다.


아 근데 다리는 좀 아프다.





마지막 사진은 '고요'는 아니고, 요즘 내가 푹 빠져 있는 고양이 '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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