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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Sep 05. 2023

글생이들을 만나고 왔다

지난 주말 만나면 만날수록 채워지는 사람들을 오랜만에 만나고 왔다. 바로 나의 글생이 친구들.

이 친구들과 꾸준히 글을 써온지도 벌써 2년이 훌쩍 넘었다. 비대면 글쓰기 모임으로 만나 매일의 일상을 주제에 맞게 글로 나누던 게 엊그제 같은데 시간이 벌써 이렇게나 흐르다니. 3개월 차에 처음으로 대면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로빈과 리디아, 그리고 해연. 우리 세 사람은 대낮부터 와인을 두 병이나 비워대며 첫 대면을 거하게 기념했고, 그 인연을 시작으로 서서히 인원이 늘어나더니 이제는 9명이라는 대인원이 되었다.


하는 일도, 사는 곳도, 나이 대도 무엇 하나 접점이 없는 우리들이지만 글이라는 공통의 주제로 한 번 모일 때마다 나눌 이야기가 무궁무진했다. 모두 저마다의 이야기보따리를 갖고 삶과 꿈을 나눴다. 만나는 동안 직장이 바뀌기도 하고, 삶이 바뀌기도 하고, 대소사를 전하기도 하며 서로의 삶을 응원하는 사이가 되어갔고 나는 이번에도 글생이들을 만나며 내가 왜 이토록 이들을 좋아하는지 알게 됐다. 우리는 먹고사니즘에 그치지 않는 이야기에 매력을 느꼈다. 서로 다른 삶의 궤적을 나누며 몰입했고 눈빛이 반짝거렸다.


얼마 전에 읽었던 다니엘 슈라이버의 <홀로>라는 책에서도 저자가 우정에 대해 말하길, 우정은 사회적 강요나 제도화된 의무가 아니라 자유를 바탕으로 한 관계라고 했다. 친구는 나 자신의 소망과 기대, 혹은 요구에 따를 필요가 없고, 우리는 친구에게 아무것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 놀라운 자유야말로 친구 관계가 유지될 수 있는 조건인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렌트가 체험한 우정 철학의 핵심적 요체는 타인과의 차이에 대한 인정이었다. 아렌트의 경우 사람들과의 일치가 아니라 오히려 불일치가 실제 우정으로 이어진다고 보았다. 나와 다른 사람 사이에 경험과 생각들로 진정한 교환이 이루어지고, 솔직함과 상대방에 대한 신뢰가 확고한 진짜 우정. 하지만 동시에 그것은 이질감과 닫힌 마음을 경험하게 만들 수도 있다.

(중략)

서로가 다름을 인정할 때 비로소 그 관계가 발전할 수 있다. 그래야만 자신이 성장하게 되며, 제약이 따를 수밖에 없는 판타지의 강박들로부터 삶이 자유로워질 수 있다. 그리고 이때 내면의 자아도취적 음속장벽을 뚫고 나와 내 삶의 현실 전체를 인지할 수 있도록 친구들이 도와준다. 친구가 없이는 계속 발전해 진짜 사람이 되는 것이 불가능하다.



어릴 때부터 흔히 들어왔던 말이 있다. 고등학교 때 친구가 평생 친구라는 말. 하지만 성인이 되고 나이를 먹으면서 그 말이 나와는 꼭 맞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한국 사회에서는 유독 오래된 관계만이 '진짜'라는 프레임이 있다. 나는 그 진부함에 갇혀있는 게 싫었던 것 같다. 모두가 맞다고 외치는 그 보편적인 시선에서 나만의 박자를 찾아가는 게 진정한 내 삶 같았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나는 오래된 관계나 밀착된 관계 안에서 오는 진득함보다는 각자의 다름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계 안에서의 안온함을 택했다. 지금 내가 글생이들과 맺고 있는 관계처럼 말이다.


장강명 작가의 여러 칼럼 중 내가 유독 좋아했던 칼럼이 있다. 제목은 '흥미로운 중년이 되기 위하여'다.



젊었을 때는 잘 어울렸는데 나이가 들면서 만남이 뜸해진 또래들이 있다. 딱히 사이가 틀어진 것은 아니고, 그냥 어느 순간부터 상대와 대화하는 게 재미가 없어졌다. 그들이 내가 잘 모르는 자녀 교육 문제나 골프 얘기만 해서 그런 것은 아니다. 사실 나는 모르는 분야에 관심이 많다. 소설가라는 직업 특성상 소재를 얻기 위해서라도 더 들으려는 편이다.

(중략)

젊었을 때는 생각의 깊이보다 속도에, 완결성보다 경쾌함에 끌렸던 것 같다. 이제 순발력이나 발랄함에 지적인 흥분을 느끼지는 않는다. 젊을 때 반짝반짝해 보였던 또래들을 모처럼 다시 만났는데 오가는 이야기들이 얄팍하고 껄렁해서 놀란 적이 여러 번 있다. 최악은 “우리 그때 재미있었지” 하면서 옛날 얘기를 되풀이하는 부류다.



내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오래된 관계라는 이유만으로 애써 그 관계를 끌어왔던 시간이 있었고, 올해 그중 여러 관계를 정리했다. 14년 지기들과 작별을 고했고, 연애의 종결을 택했다. 그 모든 과정에 어떠한 미련도 남지 않았고, 심지어 후련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매정한 사람이라서가 아니라 그 관계에 어떠한 기대감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만나면 만날수록 오히려 독이 되는 관계라는 걸 나만 몰랐던 것이다. 나와 마음이 맞을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환경에 나를 데려다 놓는 것, 그렇기에 관계는 현재진행형이어야 한다는 임경선 작가의 말처럼, 사람들은 내 인생 속에서 계속 들어왔다가 또 나갈 것이다.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 관계에 진심을 다하되 그 진심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이들과는 과감히 선을 긋는 것 정도일 것이다. 글생이들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지금 내가 맺고있는 현재진행형 관계들처럼 말이다.


각자가 생각하는 서로의 모습을 묘사하는 과정에서 몸 둘 바를 모르겠다고 몸을 배배 꼬는 나에게 들려온 키워드는 여럿 있었다. 이날의 공기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는 사람, 세상의 평안을 빌어주는 사람, 음악 분수에서 최고의 음악을 뽑아낼 수 있는 사람, 그리고 돋보기.

작은 것 하나로도 충만한 행복을 느끼는 나를 묘사하는 그들의 정성스러운 문장에서 나는 다시 한번 이 만남의 소중함을 느꼈다. 그래, 내가 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그토록 특별했고(물론 체력적으로는 지치지만), 행복할 수 있었던 건 우리는 지금 이 순간에 몰입하면서도 다음을 생각하고, 서로의 내일을 마음껏 응원하는 건강한 관계이기 때문이다.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냐는 글생이들의 질문에 한참을 고민했던 나는 멀리가지 않고, 모임 하루 전날을 꼽았다. 예술의 전당에 전시회를 보러 갔다가 우연히 발견한 음악 분수 앞에서 장장 3시간을 보냈던 나와 그 사람의 이야기를 말이다. 거창하지 않았지만 그래서 더 좋았던, 소소한 행복이 충만했던 날이니까. 우리는 커피와 음료를 테이크아웃해서 벤치에 앉아 선선한 늦여름의 바람을 맞으며 클래식 연주에 맞춰 솟아오르는 분수를 멍하니 바라봤다. 하늘은 서서히 붉게 물들고 도란도란 우리가 나누는 이야기는 깊이를 더해가고 있었다. 한 타임만 보고 가자던 우리의 계획은 두 타임이 되어버렸지만 그조차 좋았다. 모든 것을 계획하에 움직이는 나의 몸이 그를 만나고 서서히 고삐가 풀려가고 있지만 그 순간들이 더욱 특별할 수 있었던 건 계속해서 말해왔던, 불편하지 않은 선택을 이어가겠다는 나의 다짐 덕분일 것이다.


다음 만남을 기약하며 우리는 각자의 인생으로 다시금 멀어져갔다. 만났다 헤어지면서도 아쉽지 않고 다음을 기대할 수 있는 느슨한 관계. 그 느슨함이 유독 더 특별해지는 관계가 있다면 바로 그들과의 만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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