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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Sep 14. 2023

10년 후에 다시 또 올게

나는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알고 있었지만 언어로 표혈할 수 없었던 것이 언어화될 때 행복했고, 그 행복이야말로 내가 오랫동안 찾던 종류의 감정이라는 걸 가만히 그곳에 앉아 깨닫곤 했다. 가끔은 뜻도 없이 눈물이 나기도 했다. 너무 오래 헤매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엄마가 지긋지긋해 하셨던 그곳으로 다시 돌아왔다. 내 마음의 고향, 절대 잊을 수 없는 그 도시. 창원.

첫 직장을 그만두고 쉬는 동안 혼란스러웠던 마음을 잠재우고자 방문했던 이후로 딱 8년 만이다. 이 동네를 더 오랫동안 걸으며 감각하고 싶어 돌아오는 날의 버스 시간도 넉넉하게 잡았다. 익숙한 듯 익숙하지 않은 길을 걷는 그 순간들 하나하나가 너무 소중했다. 그때 그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 들었다. 여행을 떠나기 전날은 내가 중학생 때 가장 좋아했던 음악들을 다시 들어봤는데, 이제 이곳에 다시 왔다. 긴 여정 속 추억을 톺아보는 시간.


장기 휴가를 받고 여기저기 여행자처럼 떠돌면서 느낀 것 중 하나가 있다. 나에게는 새로운 장소가 주는 신선함도 좋지만, 과거를 추억할 수 있는 장소를 다시 찾는 것에서 오는 벅찬 감동이 나를 더 크게 흔들기도 한다는 것 말이다. 그리운 마음에 가끔 꿈에서만 볼 수 있었던 과거의 동네가 내 눈앞에 현실로 생생하게 펼쳐졌을 때의 감정은 도무지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의 지난 연인들에 대한 마음도 마찬가지다. 그동안 몇 번의 헤어짐을 겪었음에도 단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었다. 다들 부디 나를 말끔히 잊고 자신들의 삶을 행복하게 꾸려가길 바랐다. 다시 연락한 적도 없었고, 미련이 남지도 않았다. 행여나 다시 마주쳐도 모른 척, 아니면 가볍게 안부를 묻고 지나쳐갈 정도의 인연이길 바랐다. 후회할 거였다면 애초에 이별을 고하지도 않았을 테니. 그럼에도 난 장소에 대한 애착은 여전했다. 그 장소에서 당시에 만났던 사람들과 함께했던 시간들이 그립다는 게 아니라, 어렸던 그때의 내가 마음을 담았던 장소들이니까.


나의 소꿉친구 태양이와 손을 잡고 걸었던 등하굣길도 다시 걸었다. 초등학교 3학년 때, 만약 그 아이가 서울로 이사를 가지 않고 우리가 지금까지 인연을 이어갔다면, 우린 아마 "응답하라 1997"같은 드라마를 현실판으로 여러 번 찍었을 것이다. 부모님끼리도 서로 친구였고, 창원에 처음 이사 왔을 때 친구가 없어 외로워했던 나에게 처음으로 다가온 친구이기도 했으니까. 그렇게 우리는 매일을 껌딱지처럼 붙어 다녔고, 서로 비밀도 허물도 없는 찐친이자, 나의 첫 남사친이었다.


오빠 친구들과 귀신놀이하겠다고 겁도 없이 뛰어놀던 폐가는 테니스장이 되어 있었고, 투박한 길로만 포장되어 있던 등굣길은 예쁜 다리와 색색의 꽃, 커다란 나무로 꾸며져있었다. 그곳에 계속 살았다면 입학하고 싶었던, '창원중앙여자고등학교'는 "적극적이고 조화로운 사람"이라는 교훈이 중앙현관에 커다랗게 적혀있었다(저게 무슨 말이야). 이 고등학교가 생기기도 전 공터일 때부터 공사를 시작할 때까지, 늦은 밤이면 불장난하겠다고 겁도 없이 잠입했다가 경비 아저씨들께 실컷 혼나고 도망쳤던 기억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이 겁 없는 놀이들의 서막은 모두 (친)오빠와 오빠의 친구들 덕분이다. 어릴 때의 나는 몸을 부딪치고 넘어지고 다쳐야만 직성이 풀리는 그야말로 말괄량이였으니까.


나의 첫 번째 초등학교였던 동산초등학교는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 먼발치에서만 바라볼 수 있었다. 당시에는 그렇게 크고 넓어 보였던 운동장이 이렇게나 작았던가 싶었다. 아빠가 나에게 처음 두발 자전거를 가르쳐 주다가 넘어져 다쳤던 곳도 이곳이었고, 무더운 여름밤이면 친구들과 삼삼오오 학교 스탠드에 모여 앉아 재잘재잘 수다를 떨었던 곳도 이곳이었다. 4학년이 되어 전학 가던 날, 얼마나 울고 힘들어했던지. 새 학교에 적응하지 못하고 주말마다 이곳 근처를 여기저기 배회했는데, 그 이후로 처음이다. 이곳을 다시 찾은 게. 만약 내가 이 동네에 다시 살고 싶다고 말한다면 엄마는 뒷목을 잡을 것이다. "서울로 입성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노력을 했는데!"라고 말씀하시겠지. 그 절박한 마음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봤던 나이기에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엄마의 딸은 점점 더 엄마와 다른 삶을 살고 싶어 하는 것 같다. 내 마음이 편안한 곳에 나를 놓아두는 것. 누군가가 보기에 후퇴하는 삶 같아 보일지라도, 적어도 내 세계 안에서는 계속해서 전진이었으니까.





작은 것 하나에도 깊이 마음을 담고, 시도 때도 없이 진지해지는 내 오랜 기질이 과거의 동네를 만나니 수도꼭지가 고장 난 것마냥 감수성이 폭발적으로 쏟아져 버렸다. 걸음은 멈출 줄 몰랐고, 머릿속을 둥둥 떠다니는 나의 진한 감상들은 자꾸만 흘러넘쳤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창원시(어이구, 서울시라고 쓸 뻔) 상남동의 일부일 뿐인 것을 말이다.


점심을 먹으러 식당에 갔다가 여기저기 친숙한 사투리가 들려오는 걸 느꼈다. 주문하면서 서울말을 하는 나를 사람들이 힐끗힐끗 이상하게 쳐다보는 시선도 느껴졌다. 나는 그렇게 창원의 골목골목을 하염없이 걷고 또 걸었다. 어릴 때 엄마와 자주 갔던 도서관을 지나 마지막으로 살았던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그 동네도 참 여전했다. 상가에 입점에 있는 가게들은 많이 변해있었지만, 그 동네 특유의 친숙함이 나를 다시 과거로 소환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내가 가장 발을 떼기 힘들었던,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다 추억투성이로 점철된 나의 진짜 중학교. 이곳은 외부인도 출입이 가능해 가만히 운동장을 걸어볼 수 있었다. 매일 출석 도장을 찍어대던 4층 음악실은 불이 꺼져있었다. 어릴 때는 그토록 커 보였던 모든 것들이 이제는 다 작게만 느껴지는데 그 느낌이 왜 이렇게 서글펐는지 모르겠다.





하루 종일 쉬지 않고 걸으면서 생각했다. 날짜를 정말 잘 잡은 것 같다고 말이다. 춥지도 덥지도 않은, 습하지도 흐리지도 않은, 이곳저곳을 하염없이 걷기에 너무도 적당한, 쾌청한 날씨. 가디건 하나만 걸치고 가만가만 땅을 밟으며 어릴 때 내가 뛰어놀았던 곳들을 지나는데, 그 벅차오르는 감정을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아직 정확한 단어를 찾지 못했다. 여러모로 감수성이 폭발해가는 걸 느끼며 창원에서의 하루, 드디어 마침표를 찍었다. 친구들이 보고 싶다. 태양이, 수정이, 혜경이, 예영이... 다들 잘 지내는지 문득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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