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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Oct 09. 2023

책으로 소통하는 사회를 꿈꿔본다

비가 오고 난 뒤로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 가을의 바람을 느낄 새도 없이 쌀쌀해진 날씨 탓에 겨울옷을 입어야 하나 진지하게 고민하는 요즘, 휴일을 맞이해 이른 옷 정리를 시작했다. 보통은 매년 내 생일이 지난 후(11월 초쯤)에 봄여름 옷과 가을겨울 옷을 교체(?) 하는 옷장 정리를 대대적으로 하곤 했는데, 올해는 조금 이르다. 그만큼 날씨가 빨리 추워진 탓이다. 봄여름 옷은 이미 한차례 빨래를 다 돌려놓았고, 정리해둔 얇은 옷과 옷장 곳곳에 숨겨두었던 두꺼운 옷을 차례차례 바꿔 넣었다. 원룸이라는 협소한 공간에서 옷장 정리는 꽤 신중한 작업이다. 자칫 잘못하면 서로 교체하는 시기가 맞지 않아 옷이 뒤섞이기 마련이고, 해가 지난 후에야 '아 이 옷이 여기 있었구나'하며 놓치는 일이 없어야 하니 말이다.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라 긴 영상을 하나 틀어두고 시작했다. 바로 장강명 작가님의 오래된 북토크였다. 1시간 30분 이상의 분량이라 일단은 적당하다 싶어 듣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곤조곤 말씀하시는 작가님의 목소리 톤이 좋아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도입부를 지나 본론으로 들어가면서 이건 이렇게 들을 내용이 아니라는 생각에 영상을 끄고 오후에 다시 들었다. 펜과 노트에 차곡차곡 메모하면서 말이다. 오늘 쓰고 싶은 글은 작가님의 영상에 담긴 메시지다. 재작년 <책 한번 써봅시다>라는 작가님의 책 내용과 일치하는 내용이 많아 기억을 복기하며 차분히 영상을 봤다.


작가님은 창작은 본능이라고 말씀하셨다. 정해진 것을 완성도 있게 잘 따라가기만을 바라는 학교라는 공동체와 획일화된 지금의 한국 교육방식을 비판하는 내용도 담겨있었다. 주입식 교육을 받으며 자라난 성인에게 창작의 즐거움을 가르치는 곳은 많지도 않을뿐더러(그나마 지금은 조금 다양해지긴 했지만) 다 큰 어른이 단순히 무언가를 배우겠다를 넘어 창작하겠다고 말하면 다소 신기하게 바라보는 사회이기도 하다.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다. 주변에 글을 쓴다고 말하면 작가가 되려는 거냐는 거창한 질문에 말문이 막힐 때가 많은데, 꼭 그런 거창한 이유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내 글쓰기가 그러한 것처럼 말이다.


현대사회의 공허감과 허무감은 창작의 기쁨을 누리지 못하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이라는 작가님의 말씀에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창작의 즐거움은 다른 즐거움과는 달리 크기에 한계가 없기 때문에 몇 달 혹은 몇 년에 걸쳐 준비한 글을 완성한 순간, 그 기쁨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것과 같다고. 그래서 사람은 누구에게나 그 감각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내가 지금 무언가 의미 있는 걸 만들어내고 있다는 꾸준한 감각과 성취감 말이다. 물론 꼭 글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글을 쓰고, 그림을 그리고, 음악을 만드는 것 등 그 어떤 것도 다 가능하다. 다만 글쓰기의 경우, 우선 본인이 글쓰기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단순히 글쓰기에서만 끝내지 말고 책을 한번 써봤으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목적 없는 글쓰기는 자칫 상념에 불과할지도 모르고, 단발성으로 사라지는 파편적 sns 글쓰기에 지날지도 모르니 말이다. 어쩌면 내가 도대체 무엇을 쓰는지조차 알 수 없을지도 모르고. 하지만 책을 쓰겠다는 목표를 갖고 글쓰기를 시작하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책은 기획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단순한 글쓰기의 합이 아니라 '나는 무엇을 쓸까'에서 시작돼 '나는 어떤 인간이지?'라는 질문으로까지 이어지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람은 누구에게나 자신만의 공간이 필요하다는 말씀도 하셨다. 자신만의 공간을 감각적으로 잘 꾸미라는 의미가 아니라, 적어도 나의 공간이라는 의미를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스스로의 색을 입혀야 한다는 뜻이다. 글쓰기 또한 마찬가지다. 자기만이 쓸 수 있는 스토리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배우고 자라온 교육시스템은 이 논리와 정확히 반대의 길을 아이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다양성과 창의성을 옳고 그름으로 판단하고, 규격에 맞게 정해진 틀 안에 아이들의 글 세계를 일찍이 가둬버리니 말이다. 사람마다 자신이 주력할 수 있는 분야의 글이 다 다를진대 말이다.


책이 중심이 되는 사회. 작가님이 그토록 갈망하는 그 사회를 나 또한 갈망한다. 책이 중심인 사회는 복잡한 사유를 담은 매체가 중심이 되는 사회다. 지식과 지혜, 사유가 바탕이 되는 사회다. 모든 정보가 빠르고 편리하게 전달되지 않는 사회, 불편하고 느리게 퍼지겠지만 그만큼 정보의 품질이 좋은 사회. 바로 책이 의사소통의 매체가 되는 사회다. 그렇다고 모든 책에 길고 복잡한 사유가 담겨 있다고 말할 수는 없다고 하셨다. 서점에만 가 봐도 그렇지 않은 책들이 시중에 많이 널려있으니 말이다. 책이 의사소통의 매체가 되는 사회는 많은 저자들이 '지금 여기'의 문제를 책으로 쓰는 사회일 것이다. 생각의 속도보다 생각의 깊이와 질을 조금 더 따지는 사회말이다. 지식과 지혜에는 체계와 맥락과 밀도 높은 과정이 담겨 있다. 결론만 납작하게 압축해서 빠르게 취하고 휘발되는 스낵성 정보, 글귀 등과는 엄연한 차이가 있는 것이다.


나는 어릴 때부터 무언가를 꾸준히 쓰는 사람이었다. 학교에 제출하는 "참 재미있었다"로 끝나는 일기장이 아닌, 나 혼자서만 끄적거리는 일기장이 매년 존재했다. 시기에 따라서는 그 일기장에 이름을 붙이기도(안네의 일기를 감명 깊게 읽고) 했고, 되지도 않는 소설을 끄적거려보기도 했다. 주인공들은 또 어찌나 많은지 인물 소개를 하며 진땀을 빼기도 하고, 상상력을 펼치면서도 필력이 부족해 그들의 세세한 감정을 다 담아내지 못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지난달에는 공모전에 소설 분야로 작품을 보냈다. A4용지로 출력을 해서 출판사에 보내보기는 처음이었다. 작가의 꿈이라는 거창한 것 말고 그냥 창작의 세계에 발을 담궈보고 싶었던 마음이 컸다. 소설의 좋은 점은 제한이 없다는 점이다. 에세이는 내 경험을 바탕으로 하기 때문에 나의 내밀한 이야기를 풀어쓰다 보면 자칫 자기 연민에 빠지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불편한 글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소설은 다르다. 등장인물들의 서사를 내 마음대로 상상하고 펼쳐갈 수 있었다. 어두운 글이었지만 어둡다는 것 자체만으로 치유의 과정처럼 여겨졌다. 지금의 내 삶이 어둡다는 뜻이 아니라 나는 어두운 글을 쓰면서 그 감정을 천천히 들여다보는 걸 좋아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옷장 정리에서 시작된 창작의 과정과 결론. 나는 앞으로 또 어떤 글을 쓰게 될까. 나라는 사람의 가능성은 어디까지일까. 아직도 나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해보고 싶은 일들이 많다. 나라는 사람을 더 깊이 알아갈수록 스스로가 더 궁금해진다. 오래 살고 싶은 욕심이 없기에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주어진 시간을 정성스럽고 밀도 있게 쓰고 싶다는 나의 욕심이 창작과 맞닿아버렸다. 세상에 내가 잘 할 수 있는 일들이 얼마나 많을까. 더 알고 싶다. 나의 본능이라는 그 창작의 세계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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