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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Oct 12. 2023

그녀들은 무언가를 계속 쓰고 있었다

업무 특성상 10월 중순으로 접어들면서 회사일은 점점 더 바빠지고 있다. 꿈같았던 여름휴가와 장기 휴가도 다 끝나고 이제는 정말 일에만 바짝 집중해도 모자랄 지경인데, 때아닌 연차를 냈다. 우리 회사는 탄력근무제를 적용하고 있어 시간 단위로 연차를 쓸 수 있다. 보통은 2시간, 3시간 이렇게 끊어서 연차를 내는데, 통으로 하루 연차를 내보기는 실로 오랜만이다. 그렇게 10월 11일, 자신 있게 연차를 냈다.

다름 아닌 백일장에 참가하기 위해서다.


이번에 내가 참가한 백일장은 올해로 41회를 맞이한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이다.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하고 문화체육관광부, 수석문화재단, 동아제약, 동아에스티가 후원하는, 여성이면 누구나 무료로 참여할 수 있는 백일장이다. 시, 산문, 아동문학(동시, 동화) 중 한 부문을 선택해서 제출하는데 시제 및 글제는 당일 10시 현장에서 추첨을 통해 발표된다. 발표된 4개의 글제 중 1개를 선택해 주어진 3시간 안에 글짓기를 완성하면 되는 것이다. 작성분량은 200자 원고지 20매 이내이고 직접 손으로 써서 제출해야 한다.


옷장 깊숙이 넣어뒀던 백팩을 꺼냈다. 10년도 더 된 가방인데 실로 오랜만에 등장이다. 그만큼 짐이 많았기 때문이다. 밖에서 글쓰기를 할 때 주로 챙겨가는 건 갤럭시탭인데 그건 단순히 휴대성 때문이고, 더 잘 써지는 기기로만 치자면 노트북만 한 게 없다. 지금 내가 쓰고 있는 이 노트북은 6년을 넘게 썼는데 여전히 멀쩡하다. 나의 수많은 글이 다 이곳에서 나왔을 정도로 나의 글쓰기에 가장 최적화된 기기라 백팩까지 꺼내든 것이다. 노트북과 연결선, 마우스, 펜, 메모장 등 이것저것 빠트린 것이 없는지 체크하고 이른 아침 집을 나섰다. 혜화역에 도착해서 마로니에 공원으로 향했는데 이른 시간임에도 접수처에는 이미 많은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었다. 나는 산문을 택했고 시에 비해선 확실히 줄이 짧았다. 아마 3시간이라는 제한 시간 때문에 시를 택한 분들이 많았을 거라고 추측해 본다.


10시부터 개회식을 하고 글제가 발표됐다. 추첨을 통해 선정된 이번 글제는 '새벽, 어머님, 삼겹살, 서랍'이었다. 글제를 받자마자 마음이 조급해지기 시작했다. 장소에 제한이 없었기에 글을 쓰기 적당한 근처 카페를 찾아 자리를 잡고 노트북을 펼쳤다. 작품은 원고지에 직접 손으로 써서 제출하는 것이었지만, 노트북으로 초안을 작성하고 틀을 만들 생각이었다. 나는 4개의 글제 중 '어머님'과 '새벽'을 고민하다 '새벽'을 골랐다. 막상 주제가 정해지니 글을 쓰는 건 어렵지 않았다. 빠르게 빠르게 키보드 자판을 타다닥 두드리며 글을 완성했고, A4 3장 분량의 글을 완성했다. 이제 원고지에 옮기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편안해졌는데, 웬걸. 이 작업이 생각보다 길었다. 손글씨를 좋아하긴 했지만 이렇게 많은 양의 글을 한 번에 써보는 건 너무 오랜만이라 10장을 쓰고 나니 손목이 아팠고 속도가 떨어졌다. 마음을 다잡고 다시 쓰기에 집중! 원고지에 마침표를 찍고 시간을 보니 마감시간을 20분 정도 남겨두고 있었다. 다급하게 짐을 정리하고 카페를 나섰다. 다시 마로니에 공원으로 돌아가 아슬아슬하게 작품을 제출하고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이제 뭐가 됐든 다 끝났다는 생각에 맥이 탁 풀려버렸다. 2시가 넘어 늦은 점심을 먹었고(그마저도 속이 불편했다), 터덜터덜 대학로 근처를 산책하며 정신없이 돌아갔던 머릿속을 다시 차분히 정리했다.


학창 시절 이후로 현장에서 열리는 글쓰기 대회에 참가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그때는 학교에서 열리는 행사라 강제성을 갖고 참여해서 별다른 감흥이 없었는데, 성인이 된 지금은 자발적으로 이 대회를 참가했기 때문인지 마음가짐부터가 달랐다. 주변 풍경도 마찬가지였다. 우선 글을 쓰는 사람들이 이렇게나 많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이 대회는 여성만 참여가 가능한데, 나이대도 정말 다양했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도 수상자 명단에 이름이 올라 있어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지기도 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말을 다시 한번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더 놀라웠던 건 작년에는 뱃속에 아이와 함께 이 대회에 참가하셨다가 올해는 태어난 아이와 함께 온 여성분이 계셨다는 사실이다. 사회자님은 작년에 그분을 기억하시고 "혹시 그분 오셨나요?"라고 큰소리로 외쳤고 좌석 중간쯤에서 조심스럽게 손을 든 여성분이 아이와 함께 앉아 계셨다. 이 또한 얼마나 감동적인 장면이란 말인가.



사람들이 소설을 읽는 이유는, 다른 장르와 비교했을 때 소설이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과 제일 비슷하기 때문이야. 설명하려 들지 말고 보여줘. 구체적인 모습을 보여 주라고.

<라이팅 클럽> 강영숙



최근에 읽었던 강영숙 작가의 <라이팅 클럽>에는 삶이 곧 글쓰기인 두 모녀가 등장한다. 김작가(엄마)는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 작은 글짓기 교실을 운영하고 있다. 말이 좋아 글짓기 교실이지 실상은 동네 주부들이 모여 수다 떠는 공간으로 전락하고 만다. 그럼에도 그녀들은 무언가를 계속 써 내려간다. 가끔(아니 꽤 자주) 주제를 잃고 온갖 푸념으로 대화가 마무리되긴 하지만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 왠지 모를 따뜻함이 느껴진다. 그녀의 딸인 영인 또한 마찬가지다. 결혼을 하고 미국으로 이민을 가서도 자신만의 글쓰기 감각을 잃지 않고자 계속 무언가를 쓰면서 글쓰기 모임까지 만들어 간다. 비록 목적성을 잃어버리긴 했지만 말이다.


마로니에 공원 주변을 서성이다 5시부터 시작되는 시상식 시간에 맞춰 다시 공원으로 돌아갔다. 아침에 봤던 인원보다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비록 나는 입선조차 하지 못했지만, 이 대회에 참가했다는 사실만으로 충만하게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시상의 결과를 떠나 과정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의미 있는 시간이었기에 헛헛한 마음보다는 뿌듯한 마음이 더 컸다. "우리 생활 속에서 발견하지 못했던 문장들을 새롭게 발견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는 개회사 말처럼, 하루의 시작과 끝을 온통 글쓰기와 함께할 수 있어 더없이 행복한 시간이었다.


끝으로 <라이팅 클럽>의 추천사를 쓴 이슬아 작가는 글쓰기는 '다시 보는 일'에 가깝다고 말한다. 쓰지 않았다면 한 번 보고 지나쳤을 무수한 장면들을 돌아서서 다시 보고 훗날에 다시 떠올려 보는 작업이라고 말이다. 어제의 백일장이 나에게는 그랬다. 그 넓은 공간 안에서 수많은 여성분들과 글 쓰는 감각을 공유하며 글쓰기의 지평을 한 뼘,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넓게 확장시킬 수 있었다.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복잡다단한 세상이지만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읽고 쓰는 이 감각을 게을리하지도, 소홀히 하지도 않는 내가 되고 싶다는 생각을 다시 한번 해본다. 누군가에게는 그저 흘러가는 하나의 순간일 뿐일 수 있는 작은 상황까지도 천천히 기록하며 삶을 소중히 가꿔가는 내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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