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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Oct 20. 2023

목소리도 손가락도 아끼지 말아야지

내일 노래를 배우러 간다. 어릴 때 학교에서 배웠던 것과 성인이 된 뒤로 다양한 경험을 통해 배운 것을 제외하면, 직접 돈을 내고 코칭을 받으러 가는 건 태어나 처음이다.


어릴 때부터 노래는 부르는 것도 듣는 것도 좋아했다. 그렇다고 좋아하는 가수가 있다거나 음악 트렌드에 민감한 편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다. 오히려 노래 그 자체만 좋아하는 편이다. 이런 말 하기 굉장히 조심스럽지만 나는 사실 BTS 멤버가 누구인지도 잘 모른다. 몇 명인지도, 어떻게 생겼는지도 말이다. 혹여 길에서 우연히 마주치는 일이 생긴다 해도(뭐 그럴 일도 없겠지만서도) 분명 누군지도 모르고 지나칠 거다. 하지만 그들이 부른 노래는 몇 개 알고 있다. 이 외에도 내가 좋아하는 노래를 어떤 가수가 불렀고, 그 가수가 어떻고 저떻고 하는 부수적인 것들은 잘 모른다. 그냥 그 노래 자체만 좋아할 뿐이다. 누군가 나에게 좋아하는 음악 장르를 물어보았을 때, OST라고 답해 놀라움을 안겨준 적도 있다. 영상이나 책, 관계 등 모든 면에서 서사를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편이라 음악도 마찬가지였을 뿐이다. 이 음악을 들었을 때, 영화나 드라마 속 어떤 장면이 딱 떠오르는 그 기분을 좋아한다. 그러면서 그때 그 장면을 혼자 가만히 곱씹어 본다. 그 음악이 질릴 때까지 들으며 말이다. 


학창 시절에도 또래 친구들 사이에서 흔히 나누는 아이돌, 연예인을 주제로 한 대화에는 늘 끼지 못했다. 일단 관심이 너무 없고, 오히려 이 분야를 검색하며 공부까지 해야 할 지경이었는데(대화가 가능하려면), 그게 참 싫었다. 흥미 없는 일에 부러 에너지를 쏟고 싶지 않았을 뿐인데, 그때부터 나는 고리타분하고 진지한 애늙은이 취급을 받곤 했었다. 그리고 그 분야(연예계?)는 지금도 여전히 관심이 없는 편이다.


노래를 배우는 이유는 단순하다. 하고 싶은 게 생겼기 때문이다.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나는 목소리가 꽤 괜찮은 편이다. 주변에서도 목소리 좋다는 말을 자주 들어왔고, 한동안은 북튜버를 진지하게 고민하며 준비하기도 했었다(지금은 잠정적 중단 상태). 그래서였을까. 노래도 제법 부르는 편이다(라고 생각한다). 지금은 무신론자가 되었지만, 한때 꽤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던 나는 교회에서도 오랫동안 봉사를 했었다. 청년부로 활동하며 이것저것 많은 봉사를 했는데 유독 좋아했던 봉사는 바로 '싱어'였다. 성가대 말고, 여성 싱어 말이다. 본당에서 대예배를 시작하기에 앞서 CCM을 부르거나 주일학교 찬양인도를 하기도 했고, 청년부에서도 찬양팀에서 오랫동안 노래를 했었다. 해외 선교를 나갔을 때도 늘 앞장서서(?) 노래를 불렀고, 다행히도 맑고 청아한 나의 고음은 CCM의 음색과 꽤 잘 어울렸다. 주변에서는 내가 노래하는 목소리가 낭랑하다고들 했다. 깨끗하게 음이 잘 올라간다고 말이다. 하지만 무신론자가 되어 교회를 가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주기적으로 노래를 할 수 있는 자리가 사라졌다. 내가 무슨 가수도 아니고, 노래방 문화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는 편이라(노래방이라는 공간은 사실 내 기준에서는 청결하지 않은 곳이다), 점점 더 목소리를 잠가둬야 했다. 정확히는 나의 '노래' 목소리를 말이다.


그러던 내가 정말 오랜만에 다시 노래를 시작했다. 목소리를 가다듬고 악보를 보고, 피아노로 계이름을 하나하나 눌러가며 한 가지 노래를 반복적으로 연습하고 있다. 오랜만에 제대로 부르려니 음정도 호흡도 불안정하다. 삑사리가 나기도 하고, 높은 음이 아닌데도 계이름을 찾아보지 않고는 그 음의 정확한 소리를 따라 하지 못하기도 한다. 목소리도 글처럼 계속 쓰지 않으면 녹슬어버린다는 걸 이제야 알았다. 하지만 매일 조금씩 연습하니 다시 옛날(?) 그 감각들을 미세하게나마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이 모든 걸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다름 아닌 나의 연인 덕분이다.


지금 만나는 나의 연인은 나를 항상 차로 집까지 데려다준다. 우리 둘은 장거리 커플인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데이트가 아닐 때도, 여행을 다녀온 내가 피곤할까 봐 터미널까지 데리러 온 적도 있다. 일이 많아 늘 피곤한 건 정작 그 사람인데, 자는 시간과 휴식 시간을 줄여가며 나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그의 마음이 고맙고, 미안할 때가 많다. 약속 장소가 정해져 있어 그곳으로 바로 가면 되는데도, 나를 데리러 오는 그 예쁜 마음 또한 너무 귀하다. 늘 뚜벅이였던 내가 이 사람을 만나고 반경이 더 넓어진 건 사실이다.


그런 그가 노래를 좋아한다. 차를 타고 운전을 하면서 나와 도란도란 얘기를 나누는 와중에도 늘 노래가 함께 한다. 최신 곡보다는 오래된 노래를 종종 틀어두는데, 다행히 나와 연배(?)가 잘 맞아 반가운 노래가 많다. 노래를 듣기도 하지만 따라 부르기도 하는 그의 모습을 가만히 보다가 알았다. 그가 노래를 꽤 잘 한다는 걸 말이다. 본인의 창법은 주로 모창이라고 하는데, 모창도 잘 해야 듣기 좋지, 그냥 따라 하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그리고 그는 노래뿐만 아니라 목소리 자체도 정말 좋은 편이다. 크리스티앙 보뱅의 <그리움의 정원에서>라는 책을 읽고, 좋았던 문장을 자신의 목소리로 녹음해 나에게 선물처럼 준 적도 있었는데, 중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너무도 좋아 지금도 여전히 찾아듣곤 한다.



고독에 강한 나는 여러 날, 여러 주, 혹은 몇 달이 된다 하더라도, 신생아처럼 자족한 채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조용히 혼자 지낼 수 있다. 하지만 네가 무위 속에 있던 나를 깨웠고, 내 고독의 힘을 무너뜨렸다.
그런 네게 어떻게 감사하지 않을 수 있을까?
우리는 사랑하는 이에게 말과 쉼과 기쁨을 포함한 많은 것을 줄 수 있다. 네가 준 가장 귀한 것은 그리움이다.
나는 너 없이 지낼 수 없었고, 너를 보고 있어도 여전히 네가 그리웠다. 내 정신의 집, 내 마음의 집은 이중으로 잠겨 있었다. 네가 창문을 깨뜨린 후에야 공기가 쏟아져 들어왔다.
얼음처럼 차갑게, 불타듯 뜨겁게, 손에 잡힐 듯 또렷하게.
너는 바로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움의 정원에서> 크리스티앙 보뱅


그래서 이 프로젝트가 시작되었다(이제 프로젝트라고 명명해 본다). 남녀 듀엣으로 그와 이것저것 해보고 싶은 곡들이 생겼고, 그 첫 시작이 내일이다. 해보고 괜찮으면 배움은 한 번으로 끝내고 주기적으로 스튜디오를 빌려 녹음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호기로운(?) 제안에 그 또한 흔쾌히 화답했다. 새로운 우리만의 프로젝트가 시작된 것이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잘 몰랐는데, 목소리의 매력이 이렇게 중요한지 처음 알았다. 사실 생각해 보면 대화하면서도 가장 많이 느껴지는 게 목소리인데, 어떻게 그걸 모를 수 있었나 싶기도 하다(나에게는 대화가 너무 중요하니까). 지난주에 살짝 노래를 맞춰봤는데, 와... 역시 노래를 잘하는 사람이랑 같이 연습하니까 연습할 맛(?)이 나는 것 같다. 앞으로의 우리가 점점 더 기대되기 시작했다.


여담이지만 이번 주에 공교롭게도 목소리와 관련된 또 다른 경험을 해볼 기회가 생겼다. 오랫동안 해보고 싶었던 봉사인데, 신청 기간도 정해져 있고, 경쟁률이 치열해서 계속 시도하지 못했던 봉사다. 바로 낭독봉사. 근데 한국시각장애인복지관에서 이번 주에 갑자기 연락이 온 것이다. 평일에만 할 수 있고, 녹음 시간이 2시간 넘게 소요된다는 점, 집과 회사와의 거리 등 여러 가지를 고려하면 평범한 직장인인 내게 쉽지 않은 결정이 시작됐다. 매주 시간 연차를 써야 하고, 그동안 탄탄하게 다져왔던 나의 루틴을 다 바꿔야 하는 일까지 생긴다. 그럼에도 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내가 좋아하는 것, 잘하는 것들을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만큼은 더 마음껏 쓰고 싶으니 말이다.


내가 잘하는 것은 손글씨와 목소리로 하는 것 등이 있다. 글쓰기는 아직 잘한다고 말하기는 너무 건방지다. 그냥 좋아하는 것일 뿐. 손글씨는 사실 여러 곳에서 증명되어왔다. 오늘은 생일을 이틀 앞두고 팀장님에게 이른 생일 선물을 받았는데, 다름 아닌 만년필이었다. 심지어 내 이니셜까지 각인된 선물이었다. 손글씨를 잘 쓰고, 좋아하는 것 같아 보여 준비했다는 팀장님의 섬세함에 감동받았지만, 괜히 민망해서 이거 혹시 퇴사 선물이냐며 너스레를 떨었다.


목소리로 시작해서 손글씨로 마무리되는 오늘의 글. 결론은 내가 잘하는 것들로 더 많은 경험을 쌓고 싶다는 것이었다. 창작은 본능이라는 장강명 작가님의 말씀처럼, 글쓰기 외에도 내가 좋아하고 잘하는 것들이 많다. 그 모든 것들을 내가 더 잘할 수 있게끔 다양한 환경을 조성해 주고 싶다.

앞으로도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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