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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Sep 28. 2023

딸 키워봐야 소용없구나

Sorry, dad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누구의 딸인지가 중요했을 뿐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데 나는 평생을 바쳤다.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중략)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가 무거웠다고, 나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변명을 들을 아버지는 이미 갔고 나에게는 변명의 기회조차 사라졌다. 그 사실이 뼈아파 나는 처음으로 소리 내 울었다. 아버지를 위한 울음이 아니라 나를 위한 울음이었다. 아버지 가는 길에까지 나는 고작 그 정도의 딸인 것이다.

<아버지의 해방일지> 정지아



사당역 근처에 위치한 <다정한 서점>에서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지정도서로 한 독서모임이 열렸다. 꽤 유명했던 책이라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며 책 리스트에 넣어두기만 했는데, 이참에 잘 됐다 싶었다. 심지어 독서모임의 리더님이 '나묭'님이라니! 이건 꼭 신청해야겠다 싶어 과감히 신청 버튼을 누르고, 신청서를 작성했다.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전직 빨치산인 아버지의 죽음 이후 3일간의 장례식장을 배경으로 한다. 주인공(고아리)은 자본주의 사회에서 일평생을 사회주의자로 살아갔던 아버지(고상욱)의 지난 삶을 장례식장에 찾아온 손님들을 통해 조금이나마 이해하기 시작한다. 용서와 화해라는 묵직한 키워드를 담고 있지만, 구수한 사투리와 등장인물들의 투박한 행동을 작가만의 쫄깃한 문체로 표현하고 있어 흐름 자체는 블랙코미디에 가깝다. 이 책을 읽다가 혼자 빵 터지거나 키득키득 웃게 되는 장면도 많았다. 정지아 작가가 32년 만에 발표한 장편소설이라는데, 독자를 울렸다가 웃겼다가 복합적인 감정선을 끌어내며 종내는 감동을 느끼게끔 하는 책이었다.


이 책은 정지아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기도 하다. 그녀는 태어나서부터 빨치산의 딸이었고, 그 이유 하나만으로 연좌제처럼 굴레에 갇힌 삶을 살았다. 1990년 <빨치산의 딸>이라는 장편 소설로 데뷔한 정지아 작가는 처음 그 책을 출간했을 당시, 문단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판매금지 당했다고 한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사회적 시선에서 벗어나기 어려웠던 그녀는 소설을 통해서라도 그 이해의 과정을 담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아버지의 해방일지'는 나 잘났다고 뻗대며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다. 나름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했는데 나이 들수록 잘 산 것 같지가 않다. 나는 오만했고 이기적이었으며 그래서 당연히 실수투성이였다. 신이 나를 젊은 날로 돌려보내준다 해도 나는 거부하겠다.
오만했던 청춘의 부끄러움을 감당할 자신이 없으므로.
(중략)
그렇게 동동거리며 조바심치며 살다가 알게 되었다. 빨치산의 딸이므로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갈 수 없다는 것을. 나의 비극은 내 부모가 빨치산이라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내 비극의 출발이었다.
쉰 넘어서야 깨닫고 있다. 더 멀리 더 높이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행복도 아름다움도 거기 있지 않다는 것을. 성장하고자 하는 욕망이 오히려 성장을 막았다는 것을.



이 책의 첫 문장은 "아버지가 죽었다"로 시작된다. 그것도 전봇대에 머리를 박고 말이다(이렇게 어처구니없이). 알베르 카뮈 <이방인>의 첫 문장과도 닮아있는 이 문장을 읽으며 앞으로의 이야기가 어떤 방향으로 전개될지 궁금한 마음으로 첫 장을 넘겼다. 모임이 열리기 일주일 전쯤에는 서점 사장님으로부터 발제문을 전달받기도 했다. 이번 모임의 리더인 '나묭'님이 작성하신 것 같았는데, 질문 자체가 많기도 했지만 깊이 생각할 주제들도 있었다. 제대로 답변할 수 있을까를 걱정하며 모임에 참석했는데, 웬걸. 우리는 발제문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연령대도 정말 다양했다. 누군가의 딸, 누군가의 어머니, 누군가의 아버지, 누군가의 아들, 심지어 모녀가 함께 오기도 했다(자매도 있었다). 아버지를 이해할 수는 있지만 용서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이도 있었고, 부모 세대의 '사랑 없는 결혼'이라는 무거운 주제도 오고 갔다. 


"아버지는 OO이다"라는 문장을 각자의 경험에 비춰 만드는 시간도 있었다. 의견은 다양했다. 나의 미래 모습이다,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이다, 착한 사람이다, 어쩔 수 없는 가족 구성원이다, 내가 닮은 사람이다,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다, 오늘 하루를 너무나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다 등 온갖 수식어가 달렸다. 그리고 나의 답은 이러했다.



아버지는 조연이다


내 인생 속 주연은 늘 엄마와 나였다. 그 안에 아빠는 없었다. 그걸 지금까지 몰랐는데, 그날의 모임에서 알았다. 엄마를 향한 나의 짝사랑이 있기 이전에, 나를 향한 아빠의 짝사랑이 있었다는 사실을. 나는 엄마와의 치열한 싸움에서 아빠를 늘 뒷전에 뒀다. 아빠는 늘 나를 챙겨줬던 사람이니까,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일까. 엄마에게 그토록 인정받고자 30년을 아등바등 몸부림쳤던 나의 과거 속에 아빠는 어디 있었을까.


아빠가 내 인생에 조연이었던 이유를 설명하다 눈물이 왈칵 쏟아져 버렸다. 그곳에 있던 사람들은 갑작스러운 내 눈물에 당황한 나머지 우왕좌왕하며 휴지를 건네기 바빴다. 나는 애써 목소리를 가다듬고는 느릿하게 다음 말을 이어갔다. 소설 속 주인공의 독백처럼 나는 아빠에게 어떤 딸이었을까, 생각이 깊어졌다. 어릴 때만 해도 나중에 커서 아빠 같은 남자랑 결혼할 거라고 당당하게 외치던 나는, 사춘기 때 해외출장으로 인해 부재했던 아빠와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한 채 성인이 됐다. 엄마와의 치열함에 아빠가 설자리는 없었고, 우리의 간극은 점점 더 벌어지기만 했다. 사이가 나빴던 건 아니지만, 아빠와 둘이 있을 때면 어색한 공기가 감돌고 어떤 대화를 나눠야 할지 물음표가 뜨기 일쑤였다.


아빠의 핸드폰 속에 저장된 내 이름은 여전히 '나의 천사'다. 아빠가 출장 가는 날이면 눈물이 그렁그렁해서는 공항까지 같이 가겠다고 떼를 쓰던 어린 딸은 이제 다 큰 성인이 되어 집을 나갔다. 가끔 닿는 연락에도 서로의 근황만 간결하게 묻고는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 아빠와 나의 관계를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 나는 여전히 잘 모르겠다. 다만 조연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닐 것이다. 주연보다 맛깔나는 조연도 있으니까. 조연이 있어야 주연이 살 수 있으니까. 이제 내 인생의 주연은 엄마도 아빠도 아니다. 오직 나, 그리고 내가 능동적으로 관계를 맺는 누군가일 테지. 내일은 아빠를 만나러 간다. 정확히는 가족들을 만나러 간다. 추석이니까, 오랜만에 얼굴을 보러 가는 것이다.


다만 이 이야기는 아빠에게만큼은 비밀이다. 아마 영원히 비밀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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