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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Nov 10. 2023

병든 딸은 알아서 잘 살아갈 테다

제 인생입니다.

친밀감이란 공유와 밀착만 가지고 형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공유와 경계선이 균형 있게 지켜질 때 형성될 수 있다. 경계선을 무너뜨리며 딸을 통제하는 방식은 내 어머니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또 그 어머니가 그녀의 어머니에게 물려받은 정신적인 유물과도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이 대물림을 종식하기 위해서는 인식하고, 질문하며, 질문에 대한 답변을 존중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그러지 않는 한 경계선 침범은 계속될 수밖에 없다.

<모녀의 세계> 김지윤



자격에 대해서 종종 생각한다. 더 나아가 쓸모에 대해서도. 나라는 사람, 1인분의 쓸모에 대해서 말이다.


얼마 전에 다녀왔던 탈 가정 청년들의 공연과 그들의 에세이를 읽으며 유독 마음이 아팠던 건, 존재 자체로 인정받지 못했던 그들의 과거에 공감해서다. 나 또한 존재자체만으로 사랑받는 경험의 부재가 쌓였던 어린 시절을 지나 지금의 내가 됐고, 그 경험 덕분인지 사람을 쉽게 믿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목적 없는 사랑에 의문을 갖고서 "왜?"라고 속으로 질문한다. 물론 나는 매력이 많고(네네), 사랑스러운 사람이라는 것에 자신감은 있지만 그것과 별개로 사람을 잘 믿지 못한다. 엄마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은데, 엄마 이야기를 하지 않고는 이 이야기가 흘러가지 않는다. 나의 뿌리와도 같은 과거의 이야기들 말이다.


어젯밤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그제와 어제의 일정을 다소 무리했던 탓이다. 개인적인 일정과 회사 업무로 이틀 연속 봉천동을 다녀왔고, 낯선 동네를 두 번이나 다녀온 탓인지 몸에 무리가 갔나 보다. 평소보다 일찍 잠자리에 들었지만, 많이 피곤했던지 잘 꾸지 않던 악몽을 꿨다. 덕분에 어수선한 상태로 새벽에 눈을 떴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엄마의 부재중 전화였다. 잠이 든 내가 전화를 받지 않자 카톡도 남겨 놓으셨다. 그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며 가장 먼저 올라온 감정은 불안함과 걱정이었다. 엄마를 걱정하는 게 아니라, 이번에는 또 무슨 일로 나에게 연락을 하셨을까 하는 불안함과 걱정말이다. 벌써부터 숨이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에 받았던 엄마의 전화도 떠올랐다. 그 주제의 연장선이 아닐까를 생각하니 더 숨이 막히는 것 같았다.


회사에 도착해서 엄마에게 카톡으로 답장을 했다. 어제 일찍 잠드는 바람에 전화를 놓친 것도 있지만, 보통 그 시간이 내 평소 수면시간이기도 했기에(일찍 잠드는 편이라) 자느라 몰랐다는 카톡을 보내며 무슨 일 있으시냐는 말을 덧붙였다. 카톡을 보내고 잠깐 커피를 내리러 회사 라운지에 다녀온 사이, 다시 부재중 전화가 찍혀있었다. 멍하니 핸드폰을 바라봤다. 카톡에 대한 답은 없었다.

전화를 하고 싶으신 걸까? 용건만 간단하게 물었던 나의 카톡에 화가 나신 걸까?


불안한 마음이 다시 올라왔지만 전화하고 싶지 않았다. 금요일 아침이었고, 기분 좋은 출근을 했다. 엄마와의 부딪침으로 오늘 하루를 망치고 싶지 않았다. 독립하고 가장 좋았던 이유가 다시 한번 선명하게 떠올랐다. 내가 말하고 싶지 않을 때, 입을 닫을 수 있는 자유. 그 집에 함께 살 때, 엄마는 아무 때나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왔다. 노크 따위는 사치다. 당신이 하고자 하는 말만 다다다 쏟아내 버리곤 했으니까. 그 시간이 밤이든 낮이든, 내가 자고 있든, 출근 준비를 하고 있든 아무 상관없었다. 당신이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그냥 해야 하는 것이다. 나(따위)의 상황에는 아랑곳하지 않고서 말이다. 이어지는 엄마의 카톡은 나를 또 불편하게 만들었다. 추궁당하는 기분, 검열당하는 기분. 나의 건강을 걱정하는 게 아닌, 미래에 아플 나를 떠안을 자신의 안위를 걱정하는 기분. 책임져달라고 말한 적 없는데도 유독 나를 도구처럼 대하는 엄마의 일방적인 말에 거친 말로 답을 할까 잠시 망설였다. 다다다다 써 내려간 글의 전송 버튼 하나를 두고 얼마나 고민했던지. 에라 모르겠다. '전송'


다행히(?) 엄마는 그 글을 바로 읽지 않았고, 나는 그 메시지를 바로 삭제했다(이 무슨). 엄마가 미리보기로 그 글을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적어도 내 세계에서 엄마는 저 문장들을 읽지 않았다. 차라리 잘 됐다. 내가 바란 결말이다. '엄마가 저 글을 읽고 나의 마음을 알기를 바라지만, 엄마가 읽었다는 사실을 나는 몰랐으면 좋겠다'의 상태. 죄책감이 들 테니까. 하지만 아셔야 하니까. 더 이상 이 관계를 그런 식으로 끌고 가고 싶지 않다는, 그 무례함을 더 이상 내가 용납하지 않을 거라는 메시지를 명확하게 전달하고 싶었으니까.


오늘은 정말 일찍 출근했다. 회사에도 가장 먼저 도착해 오랜만에 건물 경비 해제까지 했다. 어제 일찍 잠들어서 눈이 빨리 떠진 덕분이다. 악몽을 꿨지만 누군가의 다정함 덕분에 마음은 다시 괜찮아졌고, 기분이 몽글몽글 좋아지려던 하루였다. 엄마와 카톡을 주고받기 전까지는 말이다. 한동안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엄마는 무엇을 걱정하는 것일까. 나의 건강? 아니다. 나의 건강이 아니라 병든 딸을 책임져야 할지도 모를 당신의 미래를 걱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나를 자꾸 추궁한다. 도구처럼 취급한다. 나의 기능을 점검한다. 나는 책임져달라고 한 적도 없는데 말이다. 아님 이제와서 잘 지내보자고? 나는 그럴 마음 없다니까. 애초에 그런 걸 배워본 적이 없는데 왜 이제와서? 오빠의 새 가족, 예비 새언니가 들어와서 그분의 돈독한 모녀 관계가 부러워 보여 갑자기 이러는 것일까? 우리도 저렇게 잘 지내보자, 뭐 이런 거? 나는 그럴 생각이 없다고, 왜 내 말은 듣지 않고 아직도 여전히 일방적인 것일까. 언제부터 우리가 그렇게 살갑게 지냈다고. 해본 적이 없는데, 당신만 마음이 풀리면 나의 기분과 생각 따위 아랑곳하지 않는 그 다그침이 싫다고, 나는.


내 필터가 고장 난 것일까. 내가 비뚤어진 것일까. 엄마의 진심을 자꾸 왜곡되게 받아들이는 것일까. 결국은 이 모든 상황에서 내가 이상한 사람인 걸까? 아침부터 꼬리에 꼬리를 무는 불편한 죄책감에 잠식되었다. 그럼에도 다시 선을 긋고 싶어졌다. 다음 주에 있을 가족들과의 만남이 벌써부터 부담스럽게 느껴졌다. 가고 싶지 않아 졌다. 좋은 기회가 닿아 고급스러운 식당을 예약한 오빠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정말로 가고 싶지 않아 졌다. 그 자리에서 엄마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 나의 안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닌, 병든 딸의 쓸모를 자꾸 걱정하는, 나를 떠안아 책임질 지도 모를 자신의 미래를 걱정하는 엄마를 마주할 자신이 없다. 나는 더 건강해지고 싶어졌다. 나의 건강 때문에 누군가에게 도움 받고 날개를 꺾일 일이 없도록. 나 혼자 이 세상을 꿋꿋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아플 바에는 차라리 눈을 감을 수 있도록 더 건강해지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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