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민해 Nov 15. 2023

불안한 날에는 잡생각이 많아진다

저만 그래요?

불안하면 입술을 뜯는 버릇이 있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랫입술을 윗니로 잘근잘근 씹으며 뜯어낸다. 무의식 중에 반복하는 행위라 심한 날에는 비릿한 피맛이 느껴질 때가 되어서야 뒤늦게 정신을 차릴 때도 있다. 보통은 삶에 거대한 변수를 눈앞에 두고 있을 때, 이 증상이 올라오곤 하는데 오늘이 딱 그랬다. 상황이 시시각각 변해가는 오늘과 같은 날. 급변하는 상황에 발 빠르게 대처하는 누군가가 있다면 나는 그 반대. 예기치 못한 상황들은 그나마 겨우 잠재웠던 불안감을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르게 만든다. 괜찮아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그저 요 근래 내 삶에 변수가 없었을 뿐이란 걸 명징하게 깨닫는 순간이다.




늘 익숙하게 사용해 왔던 단어들 말고 소설 속에나 등장할 법한 낯간지러운 단어들을 섞어가며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면, 마치 외국어를 쓰는 기분마저 들 때가 있다. 유창하게 영어를 하는 누군가의 모습처럼 이 세계에서 나눌 법한 어휘들을 잔뜩 나열하다 보면, 피상적으로만 오고 가던 대화에 진지함이 더해진다. 좋다, 나쁘다, 즐겁다, 대박, 헐 같은 단순한 표현들이 조금 더 촘촘하고 미세한 표현들로 부드럽고 느리게 오고 간다. 서로의 속도에 맞춰 맥락 있게 나누는 대화. 유행어가 사라지고 조사 하나에도 심혈을 기울여 대화의 온도를 맞춘다. 우리는 분명 같은 모국어를 갖고 있음에도 피상적인 대화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다.


"교정 때문에 치과를 다녀와야 해서요."라는 문장에 대체 어떤 흐름이면 "바른치과요?"라는 질문으로 이어지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초 단위로 구분하기도 어려울 만큼 빠르게 돌아온 답변 아닌 질문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우리는 타인과의 대화 속에서 속도감에 취해 핑퐁 하듯 그 대화를 이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당장 대답하지 않으면 큰일 나는 병이라도 걸린 게 아닌지. 어떻게든 상대를 웃겨보려는 그 가벼움은 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거절하면 좋을까, 멍하니 생각했다. 상대의 눈과 입을 보며 그가 하는 말을 깊이 이해하고, 천천히 단어를 골라 답하는 머뭇거림에 쓰이는 시간이 많이 아까웠던 걸까.


문해력이니 공감력이니 말들이 많은데, 결국 다른 걸 다 떠나 정성의 부재가 아닌가 싶다. 누군가가 쓴 글을 천천히 읽고 깊이 사유하며 행간의 의미를 짚어가려는 정성, 상대가 하려는 말이 무엇이고 전하고 싶은 마음이 무엇인지를 제대로 듣고 이해하며 정성스럽게 답하려는 마음 같은 것 말이다. 시기에 따라 언어도 낡아간다. 유행어처럼 익숙하게 쓰이던 단어들이 그 시기를 지나면 촌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증명사진을 찍을 때 그 시기에 유행하는 스타일보다는 가장 깔끔한 모습으로 찍었을 때, 몇 년이 지난 후에 봐도 촌스럽지 않아 보이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니까 나는 그 문해력이라는 것도 능력의 문제가 아니라 정성과 진심의 문제가 아닌가 하는 것이다. 정성스럽게 단어를 고르고, 상대의 눈을 바라보면서 천천히 속도를 맞춰가는 대화 속에서 말이다. 모르는 단어는 배우면 되는 거고, 반복적으로 학습하다 보면 시기에 차이는 있겠지만 언젠가는 익혀질 테다. 하지만 정성을 다하려는 마음은 반짝 노력한다고 단숨에 만들어지는 것도, 정량적인 지표로 나타낼 수도 없다. 정성적인 가치란 것이 대체로 그렇다. 깊이 들여다봐야 보이기 때문에 더 귀하고 의미 있게 느껴지는 것이다. 나는 그런 이들과 소중한 관계를 이어가고 싶고 말이다.




출간되기만을 손꼽아 기다렸던 반가운 책을 얼마 전에 만났다. 내가 자주 방문하는 다락방 서점 사장님이 공동 집필하신 독립출판물 <어서오세요>라는 책이다. 책의 제목처럼 '어서오세요'라는 주제로 다섯 명의 책방 지기가 함께 쓴 책이다. 책방을 하게 된 이유, 책방에서 있었던 일 등 책방지기의 사소한 일상을 글로 엮어냈는데, 나는 그 다섯 명의 작가들 중 에이커북스토어의 대표인 이명규 작가가 쓴 책방의 불청객 이야기에 유독 빠져들었다. '선'에 대한 내용이었다. 더 정확히는 선을 넘는 사람과 그 선이 넘어온 걸 인식하고 천천히 선을 긋는 사람의 이야기.



방문하는 사람들이 어떤 일을 하는지, 어떤 생각을 가지는지 모른다. 적어도 책을 보기 위해 왔다고 생각하고 그냥 가는 손님들은 찾는 도서가 없을 뿐이라 여긴다. 책을 못 판 건 부가적인 아쉬움이다.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공간은 다시 말해 누구에게나 편향되지 않는 자유로움을 품고 있다. 그런 공간으로 꾸려나가길 바라는 책방지기에게는 본인들 모임에 함께하라는 제안이 제약으로 느껴진다. 예상했음에도 그들을 거부하지 않은 또 다른 이유도 있다.

되도록 사람을 바라볼 때 그들의 현재를 보려고 노력한다. 시간이 지나며 대화를 통해 어떤 연유로 이렇게 되었고, 지금 상황이 어떻다는 것을 받아들이며 이해도를 높인다. 다만 알고 있는 정보를 가지고 편견을 드러내기보다 조심하며 말을 아낀다. 딱 이 정도 시선으로 선을 지킨다. 그리고 남들도 그 선을 지키기 바란다.

<선이라는 건 지키라는 거예요> 이명규



말과 행동에도 항상 선이라는 게 있다. 그 선은 대체로 적당함을 필요로 하지만 어떤 이들은 이 적당함의 정도를 알지 못했다. 더 나아가 적당함이라는 걸 갖춰야 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하는 사람도 많았다. 그래서였을까. 흔히 말하는 농담, 스몰토크라 불리는 것들을 싫어한다. 아니 싫어했다. 과거형이 된 이유를 최근에서야 알았다. 그 자체가 싫었던 게 아니라 그 안에 담긴 무례한 속도감이 싫었던 거다. 매너를 갖춘 위트 있는 농담과 상황에 맞는 센스 있는 말들이 상대를 얼마나 매력적이고 예의 바른 사람으로 인식하게 만들어주는지는 최근 들어 알게 된 사실이다. 말에도 예의가 필요하다. 황무지 같던 평어의 세계에 처음 발을 들이고 한동안 헤매었던 것처럼, 중요한 건 길고 짧음이 아니라 그 안에 담겨있는 예의와 존중, 정성과 진심 등의 가치들이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닫는다.


"아니 그래서 이번 글의 결론이 대체 뭔데?"라고 누군가 물어보신다면,

오랜만에 입술의 피맛을 봤다는 거?

(아 치과에서 마침 스케일링을 하고 오기는 했지)

매거진의 이전글 병든 딸은 알아서 잘 살아갈 테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