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읽자. 그리고 쓰자.
반가운 분을 뵙고 왔다. 평일 저녁의 모임 일정은 절대 잡지 않는 나의 오랜 철칙을 예외로 만들어주는 단 한 사람, 바로 장강명 작가님을 말이다.
북토크는 7시 반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처음 가보는 책방이었는데, 관악구에 위치하고 있어 더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회사 업무를 빠르게 마무리하고 평소보다 일찍 퇴근해 지하철을 타고 낙성대입구역에서 내렸다. 샐러드 가게에 들러 저녁까지 꼼꼼하게 챙겨 먹었건만, 아니나 다를까 시간이 흐를수록 체력이 급속도로 훅훅 떨어지기 시작했다. 나에게 평일 저녁 모임(특히나 금요일은 더더욱)은 역시나 무리수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았다. 붕붕 떠다니는 듯한 몽롱한 정신줄을 겨우겨우 부여잡고서 책방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조금 일찍 도착해서 아직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맨 앞자리는 부담스러우니까(내가 아니고 작가님이) 세 번째 줄의 중간쯤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내 가방 안에는 지하철에서 읽으며 왔던 작가님의 책이 있었고, 그곳에 도착해서도 작가님의 책을 받았고, 심지어 추첨에도 당첨되어 책을 또 받는 바람에 총 3권 작가님 책이 내 가방 안에 자리를 잡아버렸다(이쯤 되면!).
자리에 앉아 <책, 이게 뭐라고>를 읽고 있는데, 복도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차분하고 조용조용한 예의 바른 목소리. 바로 장작가님의 목소리였다. 그때부터 멍하던 내 정신이 번쩍 깨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자동반사적으로 머리가 맑아졌다. 오랜만에 뵌 작가님의 모습은 여전하셨다. 여전히 패션에 관심이 없으시고, 마치 동네 마실이라도 나온 듯한 복장으로 소박하게 웃고 계셨다. 나는 작가님의 이런 수더분한 모습을 좋아하는데, 이게 실은 꾸미신 거였다면 굉장히 죄송스러워지는 발언이다.
작가님은 가파도에 있는 문예인 레지던시에서 지내고 있는 요즘의 근황을 전해주셨다. 그곳에서 먹바퀴(검색하지 말아요! 엄청 징그러워요)가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바람에 서울 바퀴는 맨손으로도 때려 잡을 수 있겠다는 말씀에 큰 웃음을 주기도 하셨다. 근데 북토크 중간중간 먹바퀴가 여러 번 등장할 만큼 그 아이의 존재에 환멸을 느끼시는 것 같기도 했다(이 벌레에 대한 책도 쓰실 수 있을 것 같다고). 출판과 책문화에 대한 씁쓸하고도 암담한 이야기를 이어가시다가도 다시 시작되는 먹바퀴 이야기에 이 북토크의 정체성을 되짚어보기도 했지만, 솔직히 나는 그 시간조차 그냥 다 좋았다. 원래 정말 좋아하는 것이 생기면 그걸 좋아했던 이유들은 어느새 흐릿해지고, 좋아한다는 감정만 깊게 남아버리곤 하니까. 진행자님은 이 서점을 운영하시는 대표님이셨는데, 이 서점이 도서관을 겸하다 보니 도서문화와 출판에 대한 고충과 답답함이 많으신 것 같았다. 내가 생각하는 좋은 진행자는 자신의 말을 아끼고 주인공의 목소리를 이끌어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오히려 그분의 사담이 더 길어지는 것 같아 중간중간 짜증이 올라오기도 했다. 시간은 한정되어 있고, 내가 그분의 이야기와 푸념을 들으러 온 것도 아닌데 말이다.
읽는 사람은 점점 줄어만 가고, 혹자는 독서라는 행위 자체를 시간이 아깝다(짧은 영상으로 압축된 걸 보면 시간을 아낄 수 있다는 논리) 치부하기도 한다. 심지어 정권이 바뀐 뒤로는 지자체에서 도서관과 지역 서점 예산 등을 삭감하면서 작은 도서관이 문을 닫는 경우까지 우후죽순 생겨나고 있다. 도서관은 단순히 책을 읽는 공간만이 아니다. 책문화를 더 넓게 향유할 수 있는 각 지역의 소중한 공적 공간이자 개인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꿈의 터전이기도 하다. 독서 증진 정책을 내놓아도 모자랄 판에 예산 삭감이라니! 통탄할 일이다. 책을 위한 축제조차 축제다워야 한다며 단순 유희와 이익만을 고집하는 축제로 변질되어가는 과정을 묵묵히 지켜보는 것 또한 가슴 아픈 일이다. 다소 씁쓸한 주제로 대화를 오래 이어갔지만, 그 안에서도 작가님은 "차분한 희망"이라는 단어를 언급하셨다. 쉽게 좌절하지 않고, 쉽게 기대하지 않고, 차분한 희망을 이어간다고 말이다. 작가님이 할 수 있는 세상을 바꾸는 가장 좋은 방법은 책을 쓰는 것이라고 하셨다. 세상이 혼란스러운 건 여전하고, 지금 당장 이 모든 걸 바꿀 수는 없다. 그렇다면 어차피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세상, 좋아하는 걸 하면 되지 않겠냐는 작가님의 말씀에 가만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최근에 읽었던 <젊은 근희의 행진>의 이서수 작가도 책 말미에 단 한 명의 독자를 위해 쓴다는 말을 남겼다.
소설을 쓰지 않을 때의 나는 답답한 현실과 불명확한 자아 때문에 자주 고민에 빠지지만, 소설을 쓰고 있을 때의 나는 이야기를 통해 제법 명확한 메시지를 얻는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소설 쓰기라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발신한 이야기를 수신할 독자가 없다면, 내 소설은 마음속을 떠도는 종이 뭉치로 남아 있다가 아무도 모르게 소각될 것이다. 책으로 만들어지면 독자가 적어도 한 명은 존재할 테니, 그것만으로 소설을 계속 쓸 수 있는 힘이 생길 것 같다. 이후의 일들은 신의 영역으로 밀어두고 짐짓 모른 척하며 소설을 오래오래 쓰고 싶다.
그래, 이 마음이면 됐다 싶었다. 이제는 베스트셀러보다는 생명력이 긴 책을 쓰고 싶다는 장강명 작가님의 말씀처럼, 나 또한 그런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거창한 무언가가 아닌, 지금 내 앞에 주어진 환경 속에서의 최선. 그 최선을 매 순간 진심으로 다하는 사람이고 싶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혼자가 아니었다. 카페에서 나를 기다리며 책을 읽고 있던 그가 입구쪽으로 내려온 나를 발견하고 창문 너머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가 있는 곳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그래, 그거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