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망치고 싶었거든요.
추석을 맞이해서 오랜만에 가족들을 만났다. 내년에 결혼식을 올리는 오빠 덕분에 지난달 상견례가 있었는데, 그날 이후 처음이었다. 오빠의 아내가 되실 예비 신부님도 함께였다. 그분은 나와 동갑인데, 둘은 결혼식을 올리기 전에 신혼집을 먼저 마련해 지금 함께 살고 있다. 추석 당일의 점심 한 끼를 위해 엄마는 이틀 전부터 장을 보고 이른 아침부터 상다리가 휠 정도로 요리를 한가득 준비했다. 새 식구가 오는 만큼 한층 더 힘을 준 엄마의 요리 솜씨에 아빠와 오빠는 장난기를 가득 담아 엄마를 놀렸고, 나 또한 더 이상 반찬을 놓을 수 없는 식탁의 한도 초과에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식사가 시작됐다. 예비 신부님은 나와 달리 애교도 많고, 아빠와 엄마의 모든 말에 화답하며 대화를 주도했다. 그래도 '시'자가 붙은 집이라 불편하지 않을까를 걱정했던 나의 우려가 무색할 만큼 나보다 더 우리 가족들과 잘 어울렸다. 오빠와의 꽁냥꽁냥한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자랑하는 무해한 모습이 신선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엄마가 그토록 원했던 살가운 딸의 모습이 저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싶었다. 딸이 해주지 못한 것을 예비 며느리가 대신해주고 있어 감사하고 미안한 마음이 동시에 올라왔다. 그분은 독립을 해본 적이 없었고, 오빠와 함께 살게 되면서 처음으로 가족의 품을 떠났다고 했다. 어머니와 떨어지기 일주일 전부터 짐을 싸면서 시도 때도 없이 울었고, 지금도 목요일마다 부모님 댁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온다고 했다. 집안일을 직접 해보니 비로소 어머니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고, 자주 그립다는 그분의 감동적인 멘트에 엄마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자연스럽게 네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집중됐다. 다들 아무 말 하지 않았지만, "너도 그랬지?"라고 묻고 있는 것 같았다. 이 분위기를 망치고 싶지 않았지만 거짓을 말하고 싶지도 않았다. 잠깐 망설이다 이내 입을 열었다.
"나는 아냐, 좋았어. 행복했고 자유로웠어. 계속 벗어나고 싶었으니까."
순간 정적이 흘렀다. 먼저 정신을 차린 오빠는 다급하게 나의 말을 마무리 지었다.
"아 그치, 해연이는 우리랑 같이 살 때도 집안일 다 했으니까, 나가서도 사실 힘들 게 없지."
"응, 나는 오히려 재미있었어. 집에 있을 때는 가족들 반응을 늘 살피고 고려해야 했는데, 이제는 나 하나만 생각하면 돼서 너무 좋았어."
정말 그랬다. 나는 그 집에 살면서 숨이 막힐 때가 많았다. 하나부터 열까지 어머니의 챙김과 다정한 손길을 느꼈던 그분의 삶과는 대조적이었다. 나는 엄마의 손길은커녕 따뜻한 포옹 한번 제대로 받아보지 못한 채 차갑게 자랐다. 안아달라고 말하면 혼이 났고, 사랑의 표현은 거절당했다. 자라면서는 집안일도 내 몫일 때가 많았다. 엄마는 키워주는 것만으로도 감사하라고 늘 말했다. 누가 다 큰 딸을 이렇게 키워주냐고 감사한 줄 알라며 말대꾸하지 말고 조용히 살라고 했다. 오빠가 그 집에 함께 살 때는 오빠가 일어나는 순간부터 잠드는 순간까지 모든 걸 챙겼던 엄마였지만, 오빠가 독립한 이후로 그런 보살핌은 없었다. 아니, 같이 살 때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엄마의 보살핌은커녕 집안일을 아무리 열심히 해도 엄마의 방식대로 해놓지 않았다고 혼이 나기 일쑤였다.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보다 다른 사람들이 내게 무엇을 원하는지 신경 썼던 것 같네. 내가 뭘 좋아하는지도 잘 알지 못하면서 다른 사람들이 좋아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애썼지. 어린 시절부터 오래도록 나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을 느끼며 자라서인지 나에게는 내가 결코 타인에게 호감을 살 수 없는 사람, 멸시받을 만한 사람이라는 이상한 믿음이 있었거든. 그럴수록 나는 남들에게 더 맞춰줬고 남들이 나를 좋아하게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매번 고민했어. 그렇게 내가 뭘 좋아하는지, 뭘 싫어하는지도 모르는 채로 남들이 하자는 대로 끌려다니고 남들의 욕구를 충족시키느라 나의 욕구를 무시했지. 그때 내가 느꼈던 가장 큰 두려움은 다른 사람들이 내게 실망하는 거였어. 나는 절대로, 절대로, 누군가의 짐이 되고 싶지 않았어.
<아주 희미한 빛으로도> 최은영
그 집에서 독립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나는 내 삶을 찾았다. 온전히 나를 돌보기 시작했다. 누군가의 감정에 휩쓸리지 않고, 나의 감정만 살피면 된다는 생각에 마음이 편안해졌다. 여자 혼자 사는 삶이 위험할 때도 많았지만, 그럼에도 다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길바닥에 나 앉는 한이 있어도 저 집으로는 절대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나는 그곳에서 매일 숨이 막혔으니까, 감옥 같았으니까.
지금 나와 엄마의 관계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 표면적으로는 그렇다. 어쩌면 그건 문제를 문제로 삼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엄마가 전과 같은 행동을 했을 때, 내가 절대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이기도 하다. 숨죽여사는 시간이 너무 길었다. 30년을 그렇게 살았다. 나는 나의 감정을 무시당한 채 엄마의 감정 쓰레기통처럼 취급당할 때가 많았다. 아직도 그때의 일들을 생각하면 새벽에도 숨이 막힌다. 이제는 엄마가 내 삶을 휘어잡으려고 할 때마다 어디로든 도망칠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있다. 이 관계를 단호하게 끊어버릴 각오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나는 웃는다. 이 표면적인 관계를 망치고 싶지는 않다. 비록 내 삶의 내밀한 이야기를 솔직하게 말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지만 서글프지 않다.
오빠의 예비 신부님이 자신의 어머니와의 다정한 관계를 말할 때마다 부러운 눈빛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는 엄마의 모습이 정말이지 부담스럽다. 나와 그런 관계를 바라는 것 같은 행동을 할 때마다 나는 뒷걸음질 친다. "하던 대로 하세요. 저한테 이제 와서 이러지 마세요."라고 단호하게 말하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는 못하고 씁쓸하게 웃는다. 엄마에게 오래오래 건강하시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는 엄마와 함께 살 생각이 추호도 없다고 말한다. 계속 웃으면서 말이다.
"행복한 가정은 모두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라는 소설 속 문장처럼, 우리 가족 또한 마찬가지다. 다른 가족들도 마찬가지일 테지. 모두 저마다의 사정이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명절이니까, 나는 웃었다. 딸로서 최소한의 도리는 하고 싶었다. 앞으로도 나는 그 표면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겠지만 나의 깊은 속마음을 엄마에게 전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날도 내가 없는 부엌에서 나를 욕하는 엄마의 목소리를 어렴풋이 들었다. 다름아닌 오빠와 예비 신부님께 말이다. 엄마는 지금도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