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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민해 Dec 04. 2023

비명에도 색깔이 있답니다

같은 것도 다르게 보면 이런 느낌이지 않을까 싶다. 지난주에 다녀온 리움미술관 이야기다. 미술작품에 조예가 깊은 편은 아니지만, 나름대로는 서울에 있는 여러 미술관을 다녀왔다 생각한다. 그 여러 미술관들 중 이토록 관리가 잘 되어있고, 직원이 많은 미술관은 처음 봤다. 전시장의 작품 보호부터 동선 안내 및 질서 유지 등을 담당하는 직원들 말이다. 외관도 어찌나 크고 웅장하던지 한남동에 위치해있다는 것부터가 힌트였을까, 역시는 역시였다. 리움미술관은 한국 고미술과 국내외 근현대 미술을 다루는 삼성문화재단 산하의 사립미술관이었다.


내가 이번에 다녀온 전시는 김범 작가의 <바위가 되는 법>이라는 전시였다. 7월부터 시작한 전시인데, 12월 3일이 마지막 날이었다. 가고 싶은 전시회의 목록은 여전히 차곡차곡 쌓여가고 있지만, 마지막 날을 하루 앞둔 지난 주말에서야 일정을 조정하고 발걸음 할 수 있었다. 이번 전시는 1990년대 초부터 2010년 중반까지의 작품으로 구성된 대규모 전시로 회화부터 조각, 설치, 영상 등 다양한 종류의 작품(70여 점)을 만나볼 수 있었다. 전시 제목인 <바위가 되는 법>은 김범 작가의 아티스트 북 <변신술>에서 발췌한 것이라고 하는데 제목처럼 꽤나 독특한 전시였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고, 세상의 고정관념을 작가만의 세계로 재구성하고 뒤흔들었다는 점이 굉장히 매력적이었다.



4. 바위가 되는 법

한 장소를 정하되 가능하면 다른 바위가 많은 곳에 자리 잡으면 도움이 된다.
앉거나 눕는 등 몸을 낮추어 하나의 형태를 정하되, 주변 환경과 어울릴 수 있는 자세를 취한다.
움직이지 않고 숨소리를 죽인다.
모든 계절과 기후의 변화를 무시하고 아무런 생각도 하지 않는다.
만일 폭우등의 물리적인 힘이 가해져 그에 의해 자리가 움직여지거나 아래로 구르게 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개의치 않고 본래의 자세를 흩뜨리지 않는다.
땅에 닿는 부분에 이끼가 끼거나, 벌레들이 집을 짓게 되면 다치지 말고 보존한다.



작가의 작품은 그야말로 독창적이었다.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오디오 도슨트를 즐겨듣지 않는 터라 제목 하나만으로 그의 작품 의도를 파악하느라 무지 애를 쓸 정도로 말이다. 그래도 좋았던(이걸 좋았다고 말해도 될지 잘 모르겠지만) 것 중 하나는 각 작품마다 제목 외에 어떠한 해설도 적혀있지 않다는 점이다. 나는 활자 중독에 가까운 편이라 미술관에 가서도 작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며 작가의 그림을 감상하기보다는, 작품 옆에 있는 제목과 설명을 더 꼼꼼히 읽어볼 때가 많았다. 정작 그 문장들에서 받은 영감이 작품에서 오는 감상보다 선명한 기억으로 남을 때도 많았고 말이다. 하지만 이번 전시는 그렇지 못했다. 어떠한 설명도 없이 작품과 작품 제목만 덩그러니 있었으니까. 오디오 도슨트를 듣지 않고서는 도통 이게 무슨 작품인가 싶은 것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래서 더 좋았다. 한 작품을 이토록 오랫동안 바라보며 감상했던 적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작가가 의도한 제목과의 연관성을 가만히 상상하며(하지만 감히 내가 짐작할 수 없을 만큼 난해한 작가라는 사실), 그 앞에 붙박이처럼 오랫동안 자리를 지키고 있을 때가 많았다.


그 기괴함에 정점을 찍은 작품은 바로 <노란 비명>이라는 작품이다. "참 쉽죠?"라는 한 마디로 유명한 우리의 밥 로스 아저씨처럼, 단조로운 배경 속 이젤 앞에 선 강사가 다양한 색의 물감들을 팔레트에 섞으며 그림을 그리는 영상이 어두운 공간에서 펼쳐졌다. 화면 속 강사는 말 그대로 비명을 지른다. 붓이 흐르는 방향과 함께 으아아아아아아아악! 하고 말이다. 진지하게 영상을 보다가 기습적으로 빵 터지고 말았다. 겨우 웃음을 꾹꾹 눌러 참고 있는데, 내 옆에 있던 꼬마 아이가 귀를 막으며 "할머니, 시끄러워."라고 말해 결국 폭소가 터지고 말았다(푸핫).


그 작품 외에도 흥미로웠던 작품 중 하나는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고 배우는 사물들"이었다. 오래된 컵과 그릇, 과도, 선풍기, 커피포트 등이 칠판 앞에 나란히 앉아 제목 그대로 자신이 도구에 불과하다는 것을 배우고 있다. 이 모습은 개인과 세상의 의미를 일방적으로 정의하고 강요하는 독단적인 교육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는데, 지금 현대인들의 모습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겨졌다. 물론 의인화 웃음 코드에 취약한 나는 그  진지함을 이기지 못하고 귀엽다를 연발하며 그들의 모습을 오랫동안 지켜봤지만 말이다. 개별성과 정체성을 잃지 말아야 한다는 작가의 묵직한 메시지에도 불구하고, 작품 자체만이 주는 신선함과 기발함은 위트 있는 변신술과도 같다 여겨졌다. 이 작품 옆에 있는 또 다른 작품들의 이름은 '정지용의 시를 배운 돌', '자신이 새라고 배운 돌', '바다가 없다고 배운 배' 등 그야말로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한 제목과 작품들이었다. 심지어 사물들을 가르치는 이들조차 왜 이렇게 진지한지. 나 원 참, 웃지 않을 수가 없잖아.



세상 진지하게 듣고 있는 에프킬라 칭찬해



이번 달이 벌써 올해의 마지막 달이다. 한 해 동안 다녀왔던 전시들을 가만히 되짚어보니 대체로 만족스러웠던 기억이 많다. 미술작품에 조예가 깊지 않은 얄팍한 지식이지만 그럼에도 즐길 수 있었던 건, 내 지적 수준이 올라갔다기보다는 해석에 얽매이지 않고, 작품 그 자체의 감각을 온전히 즐기기 시작한 태도 덕분일 테다. 주입식 교육에 익숙한 나였기에 늘 무언가 정답을 찾아 헤매기 바빴지만, 올해 하반기부터 그 습관을 내려놓기 시작했다. 기질적인 특성을 단번에 바꿀 수는 없기에 아직도 가야 할 길이 멀지만, 적어도 너무 힘을 주며 살고 싶지는 않아졌다. 같은 사물을 보고도 이토록 기괴한(?) 자신의 이야기를 펼쳐가는 김범 작가의 세계처럼, 불편한 선택을 하지 않겠다던 나의 다짐이 앞으로도 계속 흔들리지 않았으면 좋겠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누리며, 닥치지 않은 미래를 굳이 당겨 걱정하지 않도록 말이다. 예상했던 시간보다 훨씬 오랫동안 작품들을 감상하느라 다음의 일정은 소화하지 못했지만, 그럼에도 좋았다. 엘리베이터조차 미술 작품 중 하나라는 사실에 놀라웠던 리움미술관에서의 시간들을 오래 기억할 것 같다.


날이 추워질수록 (원래도 많은)생각은 더 많아지고 감수성은 수면 속으로 잠기듯 깊어져만 간다. 내 방도 골방처럼 아늑하게 느껴지고 책 속으로 풍덩(이라는 표현을 쓰면서도 괜히 춥다) 빠져드는 기분이 꽤나 포근하다. 어쩌면 감기 기운 덕분에 몽롱함이 더해져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월요일인 오늘도 퇴근길 추위는 여전한데, 시민들은 차가운 바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신세계 백화점의 미디어 파사드 앞에서 연신 셔터를 누르고 있었다. 군중 속에서 홀로 버스정류장을 향해 뚜벅뚜벅 역행하듯 걸어가는 그 느낌이 왜 이리 좋았을까. 주말에 알게 된 "순례자"라는 노래의 제목처럼 말이다. 코로나도 걸리지 않았던 내게 정말 오랜만에 감기가 찾아와버렸다.


뭔가 몸이 나른하다. 얼른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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