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까지?
사랑해라는 말을 이토록 아낌없이 쏟아내는 영화가 또 있을까. 아름답다는 말로 부족해 영화를 보는 내내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색감을 몽환적으로 연출한 것(언뜻 보면 예쁜 필터를 장착한 뷰티 카메라 어플 같은 느낌?)도 감독의 의도인 것 같았는데, 현실인지 꿈인지, 현재인지 미래인지 시점을 분간하기 어렵도록 장면 또한 여러 번 전환된다.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운이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영화관의 불이 켜지지 않는 점도 인상 깊었다. 보통은 엔딩크레딧이 올라감과 동시에 불이 켜지면서 관객들이 우르르 일어나 영화관을 빠져나가느라 감상이 와르르 무너지기 마련이니까.
이번에 내가 방문한 곳은 평소 애정 하던 카페에 위치한 작은 영화관이다. 정식 명칭은 <에무시네마>인데 문화체육관광부에서 지정한 예술영화전용상영관이다. <복합문화공간 에무>의 2층과 3층은 영화관이고, 1층은 앞서 말한 카페다. <카페 에무>라는 이름을 갖고 있는 이 카페는 사계절출판사에서 운영하는 북카페다. 조용한 주택가 사이 언덕에 위치해 있어 처음 이곳을 방문할 당시 길을 여러 번 헤맸던 기억이 있는데, 이제는 제법 익숙하게 발걸음을 옮기곤 한다. 다만 카페가 아닌 영화관을 방문해 보기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것도 주말 아침의 조조영화라니, 비 온 뒤 안개가 자욱한 골목길을 저벅저벅 걸어가는 그 설렘이 좋았다. 카페에 들러 커피를 한 잔 마시며 책을 읽다가 시간에 맞춰 입장했다. 소극장처럼 작은 공간이었고, 영화가 시작되기 전에 나오는 비상대피로 안내 영상도 에무시네마만의 독특한 개성을 담고 있었다.
오늘 내가 본 영화는 <너와 나>라는 영화였다. 세월호와 여고생의 사랑을 주요 소재로 다룬 영화라 보는 이에 따라 호불호가 충분히 갈릴 수 있는 영화라 생각했다. 다행히 나는 이쪽 감성이 불편하지 않았다. 감독은 이 영화를 구상할 당시 죽음을 앞둔 사랑이야기를 그리려 했는데 꼭 남녀간의 사랑이야기를 그릴 필요가 있을까 싶었다고 한다. 퀴어라는 소재를 크게 의식하지 않았고, 그저 이 소재가 엄청나게 평범한 것처럼 보였으면 했다고. 우리 일상 어디에나 존재하는 사랑의 방식 중 하나처럼 말이다.
하은이에게.
너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었는데
어떻게 시작해야 될지 모르겠다.
좋은 걸 보면 너랑 같이 보고 싶고,
맛있는 걸 먹으면 너랑 같이 먹고 싶어.
이 편지를 보고 네가 달아나지 않았으면 좋겠어.
너 마음도 나랑 같았으면 좋겠어.
좀 전에 자다가 깨어났는데 오늘은 너한테
꼭 고백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
내 마음이 너에게 닿을 수 있을까?
항상 네가 보고 싶고 걱정돼.
수학여행 다녀와서 우리 꼭 맛있는 거 먹자.
- 세미가
짝사랑인 줄 알았던 세미의 사랑이 비로소 하나가 되는 순간이었다. 하은과 세미의 진솔하고도 풋풋한 모습에 저절로 미소가 피어올랐다. 헤어지고 싶지 않아 인사에 인사를 거듭하며 사랑의 장난을 꽁냥거리는 둘의 모습은 여느 남녀커플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대상이 주는 편견을 내려놓는 장면이 아름답고 순수하게 느껴졌다. 영화를 보는 내내 어릴 적 나의 학창 시절도 새록새록 떠올랐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사소한 것 하나에도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던, 친구가 전부였던 사춘기 시절 말이다. 여고생들의 복잡 미묘한 감정을 이토록 섬세하게 잘 담아낸 감독은 분명 여자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것 또한 나의 편견이라는 걸 깨달았다. 영화를 다 보고 검색을 해보니 버젓이 올라있는 "조현철"이라는 이름 석 자에 한동안 멍했다.
그의 필모그래피를 살펴보니 내가 익히 알고 있는 유명한 작품들이 꽤 많았다. 독립영화라더니 유명한 감독이구나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는 배우로서 오랜 작품 생활을 이어왔던 것이고, 이번 영화는 그의 첫 장편 연출작이었다. 이 작품을 제작하는 데 7년이 걸렸다고 한다. 영화 모티브는 세월호 참사에서 얻었기에 스펙터클하게 표현하는 것을 지양하고 윤리적인 방식으로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랐다고. 그가 소녀들의 감성을 그토록 섬세하게 묘사할 수 있었던 건, 30대 남성 창작자이기에 여고생들을 표현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영어 입시학원 같은 곳에서 취재도 많이 하고 학생들의 브이로그도 보면서 그들만의 문화를 연구했다고 한다. 영화 중반부에는 그와 동문인 박정민 배우도 깜짝 등장하는데, 거침없는 그의 코믹 연기에 긴장감이 살짝 풀어지면서 어찌나 웃었던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여운이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영화관 밖에 마련해 놓은 작은 공간의 의자에 앉아 한동안 멍하니 창밖의 풍경을 바라봤다. 창밖으로 보이는 건 산이었는데, 흐린 날씨와 잘 어울리는 축축한 감성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기분이 들었다. 꿈에서 시작해 꿈으로 끝나는 영화. 죽음을 맞이하고 풀밭에 누워있는 여고생은 하은이자, 세미이자, 선생님이자, 아이들이자, 우리였다. 누군지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는 그(그녀)가 마지막에 눈을 뜨며 영화는 끝이 난다. 누군가의 꿈속을 정처 없이 헤매다 나온 기분마저 들었다. 자신이 10년 넘게 키우던 강아지의 죽음으로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던 하은, 키운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은 앵무새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아낌없이 속삭이던 세미. 사랑의 형태는 이토록 다채롭다. 내일 당장, 아니 오늘 당장 죽음을 맞이하게 될지라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