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내민해 Dec 14. 2023

새벽부터 다들 어디 가시는 거예요?

젊었을 때는 상대가 내 기준에 미달하면, 내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하면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하며 부들부들 떨지만 나이가 들어 다양한 경험을 거치면서 자기 자신의 불완전함을 깨닫게 되니, 상대에 대해서도 조금 관대하고 너그러워질 수 있어서 좋은 것 같아. 나이들면 확실히 열정이 넘치거나 푹 빠지는 일은 줄어들지도 모르지만, 그 대신 상대의 선하고 아름다운 지점들을 발견할 수 있는 눈이나 상대의 결핍을 이해하는 능력은 깊어지니까. 아니 정확히는 깊어져야 한다고 생각해.

<여자로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요조, 임경선



얼마 전에 첫차를 타야 할 일이 있었다. 면허만 간직한 뚜벅이라 지하철이든 버스든 가장 빨리 몸을 움직여 이동할 수 있는 수단이 필요했다. 일찍 출근하는 길에 조조할인을 받아본 적은 있었지만, 시내버스나 지하철의 첫차라는 건 타본 적이 없었다. 시간을 검색했더니 지하철은 5시 반, 버스는 4시부터 다니기 시작했다. 좋았어, 그럼 4시!


보통은 아침에 머리를 감는데, 새벽 4시까지 나가려면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 잠들기 전에 샤워를 마쳤다. 머리숱이 워낙 많은 탓에 다 말리지도 못했지만 그런 걸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누워야 조금이라도 더 잘 수 있었다. 잠깐 눈을 붙였다 생각했는데, 이미 일어날 시간이었다. 아니 근데, 이걸 일어날 시간이라고 말해도 되려나. 야행성인 누군가는 보통 이 시간에 잠들 것 같은데 말이다. 간단하게 과일을 챙겨 먹고 4시에 출발하는 첫차를 놓칠까 싶어 허겁지겁 집을 나와 버스 앱을 켰다. 앱을 보고 나서야 깨달은 것 하나는 내가 버스를 타는 곳이 시작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허허, 바본가. 덕분에 버스가 집 앞 정류장에 도착하기까지는 제법 여유가 있었고, 허탈한 웃음을 지으며 정류장으로 향했다.


너무 이른 시간이라 동네 거리에는 사람들이 없었다. 단순히 무섭다기보다는 기분이 묘했다. 폐허가 된 도시를 나 홀로 뚜벅뚜벅 걷고 있는 느낌이랄까.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봐도 불 켜진 집이 없었는데, 버스정류장에 다다를수록 사람들의 모습이 하나둘씩 보이기 시작했다. 이상했다. 텅텅 비어있을 거라 생각했던 나의 예상이 보기 좋게 빗나갔다. 없기는커녕 평소 버스를 타던 시간대보다 오히려 사람이 더 많았다. 승객이 나밖에 없으면 어쩌나를 걱정했던 게 무색할 만큼 버스 안에도 승객이 가득했다. 설자리가 마땅치 않아 가장 뒷자리로 밀렸다. 간신히 맨 뒷좌석 앞 손잡이를 잡고 위태롭게 서 있었다.


다들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어디로 향하는 걸까 잠시 생각했다. 버스에 탄 승객 대부분이 우리 부모님 연배의 어르신들이었고, 여성분들이 많았다. 심지어 서로 아는 사이 같았다. 이 버스는 관광버스가 아니라 시내버스인데도 다들 아무렇지 않게 아침 인사를 건네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나 혼자만 이방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가만히 취해있다가 이어폰을 꽂았다. 얼마 전 카페에 갔다가 우연히 푹 빠져버린 에드 시런의 'Photograph'라는 곡이 잔잔하게 흘러나왔다. 그렇게 혼자만의 음악 세계에 푹 빠져들려던 찰나 누군가 내 팔을 톡톡 두드렸다(툭툭 아니고 조심스럽게 톡톡). 풀린 눈으로 멍하게 서 있다가 정신을 차리고 상대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처음 뵙는 할머니였다.


"저기 저 앞에 있는 아저씨, 두 정거장만 더 가면 내릴 거야."


밑도 끝도 없는 그분의 말씀에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더니, 다음 말을 이어가셨다.


"다리 아프잖아. 저 앞에 있다가 얼른 가서 앉아."


낯선 어른이 건네는 호의에 새벽부터 마음이 따뜻해졌다. 하지만 나 말고도 서 계시는 분들이 많은 것 같아 괜찮다고 말씀드리며 다시 이어폰을 꽂았다. 그렇게 10분 정도가 흘렀을까. 이번에는 맨 뒷자리에 앉아 계시던 다른 할머니가 내게 말을 거셨다. 나는 다시 이어폰을 빼고 그분과 눈을 맞추려고 했는데, 내 앞에 계시던(10분 전에 나와 대화를 나눈) 할머니가 대신 답하셨다.


"괜찮대. 서서 갈 거래."

"왜, 다리 아프잖아. 앉아서 가라 그래."

그분들은 정작 대화의 주인공인 나를 앞에 두고 두 분만의 대화를 이어가셨다.

"요즘 애들은 그런 거, 자꾸 막 권하는 거 싫어해. 괜찮대."

"다리 아플 것 같은데..."


정작 나에게 말을 걸진 못 하시고 내 다리가 아플 걸 걱정하셨던 할머니를 보며 괜찮다고 말씀드렸다. 두 분은 대각선 앞뒤로 앉아 계셨음에도 대화를 계속 이어가셨다. 그분들뿐만 아니라 버스에 앉아 있는 승객들 대부분이 서로 아는 사이라 물건을 주고받기도 하고, 그 중간에 서 있는 내가 전달자가 되기도 했다. 엉겁결에 카드지갑을 건네받은 나는 앞에 계신 다른 분께 물건을 전달해 드리기도 하는 등 버스 안에서 작은 모임을 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내려야 할 정류장을 두 곳 정도 앞두고 있을 때쯤 뒷좌석에 자리가 하나 생겼다. 아까부터 나를 걱정하셨던 할머니가 옆자리를 가리키며 앉으라고 하셨다. 이번에는 거절하지 않고 그 자리에 앉았는데,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한숨이 비집고 나왔다. 할머니는 그런 나를 가만히 보시더니 말씀하셨다.


"앉으니까 훨씬 편하지?"

"네."


나는 웃으며 대답했고 할머니도 잘 했다는 듯 나를 보고 웃으셨다. 그렇게 두 정거장을 지나 하자 벨을 누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내릴 때까지도 그분들은 자리를 지키며 앉아계셨다. 이른 새벽인데도 색색별로 옷을 단정하게 갖춰 입고, 머리에 귀여운 핀을 꽂고 계신 분, 가방을 무릎에 다소곳이 올려두거나 행여나 떨어질세라 두 손으로 꼭 끌어안고 계신 분도 있었다. 피곤하지도 않으신지 도란도란 대화를 이어가셨다.


다들 일터로 향하시는 길이겠지? 새벽 장사를 준비하시는 걸까? 혼자 이것저것 상상의 나래를 펼치며 지하철역으로 분주한 발걸음을 옮겼다. 걸어가면서도 그분들의 모습이 계속 아른거렸는데, 그 이유가 뭘까를 곰곰이 생각해 보니 또 다른 세계를 경험했기 때문인 것 같았다. 이렇게 이른 새벽부터 하루를 부지런히 시작하시는 분들을 만난 게 설렜고, 그 부지런함 속에서도 웃음을 잃지 않으시는 모습이 좋았다. 그분들의 눈에도 내가 신기했을까. 젊은 아가씨가 이른 새벽부터 버스에 서서 가느라 다리가 아프지는 않을까 싶어 '여기 앉아요'라고 속닥속닥하시는 모습들도 다정한 기억으로 남았다.


좋은 어른들을 만나면 기분이 좋아진다. 최근에 회사 본부를 찾아온 낯선 어르신에게 심한 말을 들었다. 외부인은 신분 확인이 되지 않으면 들어올 수 없다는 나의  대답에 화가 나셨던지 무작정 소리를 지르고 욕을 하셨다. 문이 잠겨있길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여러 대 맞았을 것 같았다. 문이 부서질 정도로 흔들고 계셨으니까. 놀란 마음에 남자 직원들을 불러왔더니 언제 그랬냐는 듯 모른 척 조용히 그 자리에 서 계시길래 허탈한 마음에 화가 나기도 했다. 불쾌했던 몇 번의 무례한 경험들이 버스에서 만난 분들과의 경험 덕분에 눈 녹듯 사라져 내렸다. 그래, 아직 세상에는 따뜻하고 좋은 어른들이 여전히 많다. 그날 버스에서 만났던 분들이 오래오래 건강하셨으면 좋겠다. 행복하셨으면 좋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사랑해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